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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이은 Jun 16. 2024

'오랜만이야 너 전화번호는 아직도 기억이 나네'

[비건연애 #1] 6년 만났던 전남친에게서 온 연락

  날씨는 한여름답게 화창하고도 무더웠다. 토요일 아침, 덜컹이는 지하철을 타고 시험장으로 가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기사자격증을 공부하고 있었다. 필기시험은 한 번에 붙었지만 오늘 보러 가는 실기 시험은 떨어질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군.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봐야지.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문제집을 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정신이 몽롱했다.


  한창 틀렸던 문제를 다시 리뷰하던 와중 핸드폰 진동이 지이잉- 하고 울렸다.


  문자다.

  슬쩍 보니 모르는 번호다.


  스팸이구나 하고 무시하려는데, 내용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커진 눈으로 번호를 다시 보니 저장이 안 되어 있을 뿐 아는 번호였다. 말도 안 돼. 이런 날(시험 보는 날), 이 시간(오전 8시 16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락이 온다고?


  [잘 지내?? 오랜만이야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너 전화번호는 아직도 기억이 나네]


  그는 2년 전에 헤어진 전전전남자친구였다.



*



  - 얘들아 H한테 문자 왔는데 이거 지금 나 공부하지 말라는 거지?


  문자를 받자마자 친한 동네친구 두 명이 있는 단체카톡방에 전전전남자친구인 H한테 연락이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그는 엑스엑스엑스 보이프렌드가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한테 처음으로 연락을 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로부터 또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엑스가 하나 더 추가되어, 엑스엑스엑스엑스... 보이프렌드가 되었다.


  카톡방은 아주 뜨거웠다. 친구들의 반응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새끼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만한 게 친구들은 내가 H와 헤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봤기 때문이다.


  H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이상하고 뜬금없는 거 자기 자신도 너무 잘 알지만 혹시 오늘 시간 되냐고. 그동안 마음 한쪽에 못했던 이야기가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연락했다고. 구질구질한 얘기는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되는데 긴 얘기 아니면 문자로 해도 되지 않을까?]

 [만난 시간도 헤어진 시간도 길었던 만큼 문자로 담기엔 너무 긴 얘기인 거 같아. 그치만 너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솔직하게 알려줄래?]


  이미... 구질구질해 보이는데.

  만나서 해야할 정도로 속에 담아놨던 이야기가 뭘까.


  - 그래서 어떡할 거야 만날 거야?


  카톡방에서 친구들이 물었다.

  문제집은 덮어서 가방에 넣었다. 이번 시험은 이미 망했군.


  [그럼 두 시까지 코엑스로 올 수 있어? 나 2-3시까지만 시간낼 수 있을 거 같아]


  이놈의 호기심.



*



  코엑스에서 선약을 마치고 거의 2시 즈음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 앞에 서있는 H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H는 자기가 음료를 계산할 테니 고르라고 했다. 커피는 조금 전에 이미 마셔서 쇼케이스에 진열된 과일주스를 집었다. 머지않아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잘 지냈어...?"


  나는 엄청나게 싸늘한 말투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잘 지냈지."


  고개는 오른쪽 사선으로 살짝 기울이고,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아직 미워하고 있었으니까.


  H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부모님과 남동생은 잘 지내는지. 아직도 이슬아 작가님을 좋아하는지. H를 만나면서 만들었던 캐릭터를 지금도 그리고 있는지. 남자친구는 몇 명 만났는지. 언제부터 비건이 된 건지. 살은 왜 이렇게 많이 빠졌는지.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H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나. 헤어지기 전 나의 모습.

  그 시기는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직장 스트레스와 불안정한 식욕 그리고 운동부족으로 몸무게가 72kg까지 나갔었다. 언젠가부터 종종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고 숨을 쉬기 어려워 자리에 주저앉았던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럼에도 끙끙거리면서 출근했던 날들. 위/대장 내시경을 하고 종합건강검진을 받아봤지만 몸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신경 쪽. 그러니까 정신과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증상을 봤을 땐 공황인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 말대로 정신과를 방문해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과 함께 불안증세가 있어서 약을 처방받았다.


  반면 준비하던 9급 공무원에 합격하고 막 임용되었던 H는 마치 하늘에 붕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많아진 모임과 약속들. 언제부턴가 줄어든 애정표현. 소홀해지는 연락. 그가 시험을 앞두고 불안에 떨면서 '만약 자기가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나에게 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상황에 처해졌던 나. 그리고 이제 막 상승 기류에 올라탄 H. H는 나를 만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들을 더 즐거워하는듯했다. 사람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택한다고 했던가. 나는 H에게 자주 서운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게 그를 숨 막히게 할까 봐. 내가 침잠하는 줄도 모르고. 결국 임계점에 다다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별이라는 칼을 휘두른 건 나였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지속하는 것보다 헤어지는 편이 덜 괴로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서 노력한다는 것은, 시든 꽃에 물을 주는 것과도 같았다. 물을 줬으니 다시 돌아오겠지. 살아날 수도 있겠지. 당치 않은 기대를 품어봤지만, 꽃잎이 전부 떨어지고 나서야 정말로 끝이란 걸 인정하게 되었다.


  헤어짐을 고하던 날. 대화를 하다가 H에게 전례 없던 실망을 하게되었다.

  

  "너 정말 비겁하다. 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별로고 실망스럽다."


  그는 그런 말을 들으며 많이 당황해했다.

  근데 뭐, 덕분에 나는 더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지.


  케이크를 칼로 자르면 빵과 크림이 칼에 묻어나듯, 이따금씩 그가 나에게 주었던... 진짜 마음과 다정들이 부스러기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홀케이크만큼도, 조각케이크만큼도 아니고, 칼에 듬성듬성 붙은 크림과 빵쪼가리 정도만 아프고 힘들었다면, 그 정도면 꽤 괜찮은 것 아닌가.


  H와 헤어진 후 2년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퇴사를 했다. 당분간 쉬기로 했다. 그리고 넉넉해진 시간은 온전히 나를 가꾸는데 쓰기로 했다.

  책을 읽고, 해가 떠있을 땐 산책을 하고, 러닝과 요가를 시작했다. 원래 운동을 극혐 하는 사람이었는데, 운동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운동은 살을 빼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구나.' 더 잘 뛰고 싶고, 더 몸을 잘 쓰고 싶어서 처음으로 꾸준히 운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다.


  그리고 그동안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공장식축산의 고리에 나까지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고기를 먹는 게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안 먹으면 되는 거였다. 비건이 되자 직접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불을 쓰고, 간을 하고, 완성된 음식을 나에게 먹인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오래도록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다가. 발이 바닥을 짚었을 때, 박차고 수면 위로 간신히 올라온 사람. 그동안 못 쉬었던 숨을 헉헉 몰아 쉬는 사람. 익숙한 불행을 버리고 문득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설움까지 한 번에 밀려와 울음이 터졌다. 침대 위에서 엉엉 울었다.



   H가 나와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그를 많이 미워했다. 헤어졌던 순간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대면하고 있던 순간에도. 내가 힘든 시절에 꼭 나를 버린 것만 같아서. 심지어 직접 버릴 용기조차 없으니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만든 것만 같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H를 이해한다. 내가 그를 끊어내기로 결심하기까지 힘들었던 것만큼 그도 그랬었겠지. 6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도, 어떤 건지도 몰랐으니까. 그때는 관계의 칼을 그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칼을 빼어든 건 나였다. 그러니 H는 나랑 헤어지고 홀케이크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각케이크만큼은 힘들었겠구나. 그 사실이 나에게 위로가 됐다면 그에게 너무 가학적일까.


  이건 전남자친구와의 이별 얘기가 아닌, 그 시절 나와의 이별 이야기. 어린 시절 앨범을 뒤적이며 "그래 예전엔 그랬었지", "그런 시절이 있었지." 회상하는 것처럼 가끔 꺼내보고 다시 덮어둘 수 있는 이야기. 책 표지에 쌓인 먼지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닦곤 다시 책장에 꽂아놓는다.

  이 페이지에는 커다란 책갈피를 꽂아두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므로.



- 예고) 틴더에서 만난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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