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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서여사 Nov 07. 2024

쓰는 맛보다 쌓이는 맛을 경험한 나





나는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나름 로맨틱한 환상에 빠져 1993년초에 결혼했다. 하지만 사랑은 달콤한 환상이었고, 결혼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가진 것 없이 결혼한 남편과 나는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14만 원 단칸방에서 나의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네 집보다도 더 열악했다. 덜컹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작은 부엌이 나왔다. 부엌이라고 해 봤자 싱크대 한 칸짜리와 가스레인지가 전부였다.


화장실은 다섯 집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재래식이었다. 냄새나는 화장실임에도 아침마다 휴지를 들고 줄을 섰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196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신혼의 달콤함은커녕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전부인 집에서 점점 상실의 시간을 맞이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는 벽 사이로 스며드는 외풍과 자주 꺼지는 연탄불에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게다가 옆집에서 자주 들리는 부부 싸움 소리는 듣는 사람마저도 우울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집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 집이 나를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월셋집에서 도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탈출을 꿈꾸기에는 통장 잔고가 너무도 초라했다. 참혹한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차가운 현실을 이겨 내기 위해서 푼돈부터 아껴가며 살았다. 그때 그 시절을 끝까지 유지했더라면, 그 독한 마음도 끝까지 유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더 일찍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살아오는 동안 자주 흔들렸다. 삶이 조금 편해졌다 싶으면 여러 핑계를 대며 돈을 겁도 없이 썼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그에 따라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자꾸 잘못된 선택을 했다. 가끔은 그 선택이 후회될 때도 있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시간이 나를 단련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나이는 50대로 진입했다.


우선 절약하는 습관을 잡고 돈을 통제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수입 내에서만 지출했다. 가난이 주는 고통과 무서움을 이미 알고 있기에 내다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해 카드 빚부터 갚았다. 그 후 절약하며 모은 첫 종잣돈 500만 원을 어떻게 불릴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가난이란 사슬을 끊어 내려고 노력했다.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부터 쓰지 않던 가계부를 제대로 쓰기로 했다. 이제껏 시중에 나와 있는 가계부를 끝까지 써 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가계부를 제대로 쓰고자 첫 장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적었다.

 

‘올해 종잣돈 3,000만 원 모으기’를 크게 써 놓으니 펼칠 때마다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계부를 쓰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돈에 대해 개념도 대책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노후에 힘겨운 삶이 닥칠 거라는 두려움에 가계부를 쓰며 동시에 짠테크를 시작했다.


쓴 돈은 무조건 기록하자는 생각으로 가계부를 썼다. 그러자 나의 소비 습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유난히 집착했던 소비는 마트의 1+1 상품이었다. 두 개씩 묶여 있는 우유와 샴푸나 사은품으로 묶여 있는 물건을  보면 손이 먼저 나갔다.


가계부에 쓴 돈을 적어 보니 내가 얼마나 ‘소비 여왕’이었는지 알게 됐다. 적어 둔 가계부를 보면서 반성하니 소비에 자연스레 브레이크가 걸렸다. 각자 유난히 많이 소비하는 물건이 있다. 자신이 어디에 많이 쓰는지 찾아내 소비를 끊어야 한다.


매년 1월이 되면 호기롭게 가계부를 펼치고 써 보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지금은 매달 습관을 잡기 위해서 매일의 루틴으로 정했다. 아예 알람을 맞춰 같은 시간에 기록하니 자연스레 뇌가 가계부 쓸 시간이라고 적응했다.  


잊고 있다가도 화들짝 놀라 쓰게 되는 습관이 만들어졌다.  가계부를 통해 짠테크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자 이제야 슬슬 모으는 재미를 알아 가게 됐다. 식비 절약을 통해 아낀 돈을 모아서 통장을  만들고 적금에 가입했다. 어떤 통장에 돈이 얼마 있는지도 가계부에  적어 놓았다.


적금 통장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소비 욕망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럴 때 가계부에 적힌 통장 개수와 금액은 욕망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5년이 되어가고 나니까 ‘어라? 진짜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1년에 3,000만 원 이상 돈이 모였다. 정말 가계부만 썼을 뿐인데! 가계부를 제대로 쓰기 전에는 평생을 맞벌이해도 돈을 모으기 는커녕 노후 준비도 못 했다. 자녀 사교육비가 많이 나가는 시절에는 아예 가계부와는 담을 쌓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년 동안 저축할 금액을 적어 목표를 설정해 놓고 나니 절약을 해야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기록과 절약에 의미를 두니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장 본 내역을 일일이 기재하지 않고 ‘○○ 마트 생활비 2만 원’ 식으로 묶어 기록해도 충분했다.  


아끼고 살아온지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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