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문어 엄마 아빠에게 응원을!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커온지 모른다. 아이 시절 사진을 봐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뿐 어떻게 행동하고 자랐는지 좀처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아기 때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쉼 없이 울어재꼈다. 똥 기저귀를 여기저기 만들어댔다. 조금 커서는 큰 소리로 떠들고 웃었다. 여기저기 쿵쾅대며 뛰어다니고 남들에게 부딪히고 장난감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논리도 없이 떼를 쓸 때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는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며 컸다. 누구도 이 성장과정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도 이 점을 안다. 그래서 철없는 어린아이를 몰아붙이는 대신 '부모가 문제야. 왜 아이를 안 말리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에서 그런 부모를 만나본 적은 몇 번이나 되는지 돌아보자. 안하무인에 내 자식만 최고라는 부모는 신문이나 커뮤니티 일화 같은 걸로 보는 게 대부분이다. 이렇게 회자된다는 건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 부모는 몹시 소수다.
예전에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아이에게 무서운 얼굴을 한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젊었을 때는 부모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당연히 이해가 된다. '고생이겠다'라며 공감까지 한다. 엄마 아빠는 알이 부화할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굴을 지키는 문어처럼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다양한 육아에 시달린다. 부모는 지친 나머지 세상이 나를 좀 받아주고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혹여나 아이들이 떠드는 걸 방치하는 부모도 십중팔구 이런 상태로 간절히 세상의 이해를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와 부모에 대해선 한 없이 관대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예전에는 엘리베이터 같은 공간에서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면, 엄마는 난처한 얼굴로 '아저씨가 이놈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는 흘끔 올려다본다. 웃음을 참으며 '이놈!' 하면 그제야 아이는 엄마 팔에 쏙 안긴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안고 시장에 가면,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아. 그래도 애가 아주 예쁘고 잘생겼구나!'라고 칭찬했다. 기차 안에서 아이가 떠들고 장난을 쳐도, '울고 뛰고 떠드는 게 아이들이지'하며 어른들은 너그럽게 넘어가줄 때가 많았다.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면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식당 밖으로 나가는 젊은 엄마 아빠의 뒷모습이 안쓰럽다. '참 씩씩하게 우는구나! 나중에 큰 일 하겠다!'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부모야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이득보다 너덜 해진 문어 부모를 지키기 위해 '괜찮다고, 우리도 다 그렇게 컸다고, 지금 어려움은 다 지난다고' 너그럽게 포용하는 게 압도적으로 이득이 크다.
우리는 다 그렇게 자랐다. 내가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너도 피해를 주지 말라는 말은 알에서 성인의 몸으로 깨어난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다. 아이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겐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운 사회가 되면 좋겠다. 아이를 키우는 게 사회적 특권처럼 여겨지면 좋겠다.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내가 그렇게 커왔듯이 우리 사회가 아이를 받아내면 좋겠다. 난처한 부모가 부탁하듯 '이놈'해달라고 하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이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