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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트와네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서양 미술사 /세계사

by 민윤정

어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면서, 알고보면 조금 억울할 것도 같은 그녀에 얽힌 일화들을 짚어보았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마리 앙트와네트와 관련해서 비교적 덜 알려진 (하지만, 알고보면 또 널리 알려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 일화는 어쩌면 그녀를 단두대로 이끈 결정적 사건이기도 하고, 그녀의 반대파들이 그녀를 악명높은 왕비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 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14세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만리타향 프랑스로 시집 온 어린 소녀를 프랑스 국민들과 왕실에서는 처음부터 그다지 탐탁찮게 봤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세력들에 의해서 음해를 받았고, 그녀를 보호해줄 측근이 없었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무방비 상태로 이기적이고 사치스러운 왕족의 표본이 되어버렸다.



오늘의 이야기는 마리 앙트와네트로서는 다소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프랑스 왕족의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나를 잘보여준다. 마리 앙트와네트 개인적으로는 국고가 비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름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려고도 했지만 그녀 혼자서 뭘 해내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작 국고를 비워진 것은 전대의 루이 15세 때이고 이번에 다루는 목걸이 사건도 발단은 이 때 시작된 것이다.



Elisabeth-Louise Vigée Le Brun, Marie Antoinette with a Rose (1783)

Elisabeth-Louise Vigée Le Brun, Marie Antoinette with a Rose (1783) oil on canvas ; 113 x 87 cm, Palace of Versailles


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루이 15세가 그녀의 정부 마담 뒤 베리 (Madame du Barry)를 위해 주문한 것이다. 이 마담 뒤 베리로 말할 것 같으면, 로코코 미술을 소개하면서 언급했던 퐁파두르 부인 (Madame de Pompadour: 1721-1764)이 사망한 이래, 루이 15세가 총애했던 여인이다. 퐁파두르 부인이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귀족 출신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던데 비해, 마담 뒤 베리는 매춘부 출신으로 경박하고 졸부스러운 성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퐁파두르 부인은 결핵으로 44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긴 했지만, 평생을 평온하고 풍요롭게 보냈다. 반면, 마담 뒤 베리는 루이 15세 사망 이후,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마자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활하다가 결국에는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하는 결말을 맞게 된다.


마담 뒤 베리의 초상화.

마담 뒤 베리의 초상화. 남아있는 그녀의 초상화 대부분이 소위 대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은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긴 하지만, 기존의 왕족이나 퐁파두르 부인에 비해 품격이 부족해보인다는 것이 개인적 소견이다. François-Hubert Drouais (1727-1775), Portrait of Madame du Barry (1743-1793) (1770) oil on canvas ; 62 x 52 cm, Museo del Prado




프랑소아 부셰 (François Boucher: 1703-1770)와 함께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는 퐁파드르 부인은 물론 마담 드 베리를 위해서 작품을 제작했다. 생몰년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부셰의 경우, 퐁파두르 부인과 마찬가지로 평온한 인생을 살다가 수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프라고나르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 왕실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쓸쓸한 만년을 맞이하였고, 그의 사후 한동안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생무상~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선입견인지는 모르지만, 마담 뒤 베리에 비해서 품격이 있어보이는 퐁파두르 부인이다. François Boucher (1703-1770), Portrait of Madame de Pompadour (1756), oil on canvas ; 212 x 164 cm, Alte Pinakothek



프라고나르의 <그네> (ca.1767) 로코코 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

사치와 방탕을 일삼던 귀족들의 삶의 일면을 유머스럽게 담은 프라고나르의 작품. 당연히 이 작품을 주문했었던 귀족은 맘에 들지 않아했다는 소문이다. Jean-Honoré Fragonard, The Swing (ca. 1767), oil on canvas ; 81 × 64.2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다시 그 목걸이로 돌아와보자.

"여왕의 목걸이 사건 (Affaire du collier de la reine)" 혹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이미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던 1784년부터 1785년 루이 16세의 왕궁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부인 사후 들였던 정부 마담 뒤 베리를 위해 어마무시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문했는데, 문제는 그 목걸이가 완성되기 전에 왕이 죽어버린 것이다. 왕만 믿고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사용해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목걸이를 제작했던 보석상 (Boehmer and Bassenge)은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


보석상은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구매하라고 권유했으나, 마리 앙트와네트는 왕실의 재정이 좋지않다는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 여기에 이 사기 사건의 주동자인 라 모트 백작부인 (the comtesse de La Motte)이 등장한다. 자칭 백작 부인이라고는 했으나 출신은 불분명했던 그녀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대리인이라고 나서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일설에는 혈통은 좋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신분이었다고도 하고, 출신 자체를 조작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라 모트 백작부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주모자

라 모트 백작부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주모자. Jeanne de St Remi de Valois comtesse de la Motte (1786) 16.5 × 12 cm,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라 모트 백작 부인은 로한 추기경 ( Cardinal de Rohan)에게 먼저 접근하였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비엔나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재직하면서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미움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로서는 마리 앙트와네트를 통해서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프랑스 왕실에서의 총애를 받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던 상태였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로한 추기경에게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가 사실은 그 목걸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주변을 의식해서 은밀하게 구입하고 싶어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의 서한을 위조하는 한편, 밤중의 은밀한 만남에는 매춘부를 대역으로 내세워서, 로한 추기경으로 하여금,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가 진정으로 그 값비싼 목걸이를 은밀히 구입하고 싶어한다고 믿게 하였다. 목걸이를 대신 구입해주면 호의를 되갚겠다는 약조를 받았다고 믿은 추기경은 보석값을 지불하겠다고 보석상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원체 고액이다보니, 약속했던 대금을 제때 보석상에게 지불하지 못하자, 로한 추기경은 체포되고, 보석상이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직접 찾아감으로써 사기 사건은 전모가 밝혀졌다.


2-4_Cardinal_Rohan2.jpg Portrait of Louis René Édouard, cardinal de Rohan (1734-1803)


마리 앙트와네트와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왕후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한 나머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 걸려든 인물. Portrait of Louis René Édouard, cardinal de Rohan (1734-1803)


왕과 왕비는 왕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소송을 일으켰고, 로한 추기경을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시켰다. 이 때 즈음엔 이미 라 모트 백작부인과 그의 공모자 레토 드 빌레트 (Rétaux de Villette)는 목걸이를 해체해서 처분해 버린 상태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이 사건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왕실의 일면이 드러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건의 공모자들은 무죄판결을 받거나, 가벼운 처벌 만을 받았는데 반해, 이미 수많은 가십으로 물들어 있던 마리 앙트와네트의 명성은 추락한다. 일부에서는 그녀가 사치스러운 목걸이를 주문했다가 지불을 거절했다고 믿기도 했고, 여기에 사기에 가담했다는 오해까지 더해져서 혁명 세력의 공격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여왕의 목걸이 사건 (Affaire du collier de la reine)"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실체

687개의 다이아몬드로 이뤄진 2800 캐럿의 목걸이, 당시 가치 160만 리브르 (오늘날 추청 $100-million (한화로 약 1150억)의 가치). 위의 사진은 당시 해체되었던 목걸이를 재구성한 것. 물론 그만한 돈도 없지만, 있다고 한들 이렇게 생긴 목걸이를 사고 싶지 않은데... 읽은 자료 중 하나는 이 목걸이의 디자인보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취향이 더 고상하다고 평가한 글도 있긴 했다. https://www.britannica.com/event/Affair-of-the-Diamond-Necklace



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 왕과 왕비만 처형을 당하다니!

이러면 세상 너무 불공평잖아!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사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인생말로 역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나마 로한 추기경은 이 사건으로 인해 직위를 박탈당하긴 했지만, 자신의 영지로 추방당해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머지 사기꾼 일당들은 더욱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종신형을 받았지만, 런던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 잘 사나 했지만, 그 비싼 목걸이를 가로챘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엄청 진 모양이다. 결국은 빚쟁이들을 피해 런던 호텔의 창문에 매달렸다 떨어져서 생긴 부상으로 인해 3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남편 행세를 했고, 편지 위조를 담당했던 사기꾼 레토 드 빌레트는 프랑스에서 추방된 후, 이탈리아에서 이 사기 사건에 대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가명으로 전전하다 39세에 가난한 상태에서 사망했다. 마리 앙트와네트와 닮아서 그녀 행세를 하며 사기에 가담했던 매춘부 니콜 돌리바 (Nicole d'Oliva) 역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나 28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일전에 '바니타스 정물화'에 대해서 포스팅 한 적도 있지만, 이래서야 원, 인생이 바니타스다.


처형 직전의 마리 앙트와네트. 작가 미상, 1850년경의 동판화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 장면 (작자 미상, 1793년작)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 장면. (작자 미상, 1793년작) 처형 집행자 상송 (Sanson)이 마리 앙트와네트의 잘린 목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니타스 정물화"에 대한 포스팅 링크는 아래를 클릭!

https://blog.naver.com/eunicemin/222406844328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독특한 서브 장르 - 사치스러운 정물화~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


https://blog.naver.com/eunicemin/22240284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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