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서양 미술사 - 프랑스 혁명의 후폭풍과 신고전주의, 그리고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1825)
일전에 부쉐와 프라고나르의 작품과 함께 짧게나마 로코코 미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때, 로코코 미술은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반영하는 미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언급을 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마리 앙트와네트에 얽힌 뒷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사치스러웠다'라는 한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던 왕족들의 생활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로코코 시대의 사치와 방탕함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에서 많이 다뤘으므로 오늘은, 좋게 말해서 경쾌하고 가벼운 화풍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로코코 미술과 대척점에 있는 엄격하고 도덕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신고전주의 미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전에 부셰와 푸생의 차이점에 대해서 질문을 한 댓글이 있었고, 그 대답의 일환으로 로코코 미술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참고로 이전 로코코에 관한 포스팅은 아래:
서양 미술사 - 로코코 미술의 대가 프랑소아 부셰와 유명 후원자 퐁파두르 부인
로코코 미술 - 프라고나르의 <그네>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 바로크/로코코 미술과의 관계
질문에 대한 적확한 답변이라면, 니콜라스 푸생에 대한 포스팅을 해야 맞지만, 미술사적으로 봤을 때, 로코코 미술에 대비되는 사조는 신고전주의기에 신고전주의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라 오늘은 신고전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니콜라스 푸생에 대해서 알아볼 시간은 다음 기회에. 이번에는 그냥 니콜라스 푸생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서 모범으로 삼고 있는 작가로 신고전주의 작가도 모델로 삼았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로코코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미술계에서 한동안 유행을 하면서 아카데미 살롱을 위시한 예술계를 평정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을 그대로 담은 로코코 미술은 그러한 왕족과 귀족들을 수없이 단두대로 보내버린 프랑스 혁명과 함께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로코코 미술을 후원한 세력이 통째로 없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화가들은 자신들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귀족과는 무관함을 표명하기 위해 애썼음은 물론이다.
뒤에서 열심히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나이 든 남편 몰래, 슬리퍼를 던져줌으로써 젊은 애인과의 밀약을 약속하는 나이 어린 아내. 로코코 시대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프라고나르의 대표작 <그네> Jean-Honoré Fragonard, The Swing (ca. 1767), oil on canvas ; 81 × 64.2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이에 급격하게 부상한 것이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1825)다. 서양미술사 상에서 신고전주의라고 불리는 미술사조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혁명 이후 아카데미의 핵심 세력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열렬한 혁명 지지자였다. 혁명의 강경파인 마라의 암살 사건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그린 <마라의 죽음>은 유명하다. 피부병이 심해서 집에서는 항상 약초를 담근 욕조에서 집무를 했던 마라가 반대파 여인의 손에 그 자리에서 시해를 당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마라를 마치 예수처럼 거룩하게 묘사하고 있다.
Jacques-Louis David, The Death of Marat (1793) oil on canvas ; 165 × 128 cm, Royal Museums of Fine Arts, Brussels, Belgium
그보다도 더 유명한 작품은 <호레이쇼의 맹세>라고 번역되곤 하는 아래의 작품일 것이다.(혹은 '호레이티'라고 발음) 엄밀히 말하자면 호레이쇼 가문의 맹세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작은 나라가 궁지에 몰렸을 때 그 나라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세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세 아들 모두에게 출전을 독려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부성애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애국'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다.
Jacques-Louis David (1748-1825), The Oath of the Horatii (1784/85) oil on canvas ; 329.8 × 424.8 cm, Louvre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과 후폭풍의 시대이자, 고대 그리스의 정신 계승하고자 하는 시대. 그 어느때보다 대의가 중시되고 애국심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은 항상 '애국'을 강조한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주인공은 남성이기 마련이다. 혁명의 정신을 열심히 표현하던 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에서는 항상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각오한 거룩한 남성들과 무력하게 슬퍼만 하는 여인들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아래의 일련의 대표작에서도 대의를 중시하는 남성들의 거룩한 모습들을 담기에 힘썼다. 아울러 커다란 위기 앞에서 흐느끼는 일 내지 기절하는 일 이외에 여성들이 할 일은 없었다.
Jacques-Louis David (1748–1825), The Death of Socrates (1787) oil on canvas ; 130x196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Jacques-Louis David (1748–1825), The Lictors Bring to Brutus the Bodies of His Sons (1789) oil on canvas ; 323 × 422 cm, Louvre
자크-루이 다비드는 열성 혁명 지지자였다. 하지만, 열성 혁명 지지자였다고 했지, 영원히 혁명 지지자라고는 안그랬다. 시대가 바뀌고,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이제는 열렬한 나폴레옹 지지자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자크-루이 다비드는 이 장면을 성대하게 묘사했다. 제목 하여, <나폴레옹의 대관식>.
아래는 그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라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장대한 역사화다. 무려 가로 9미터와 세로 6미터가 훌쩍 넘는 이 대작 속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수 천개의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사진처럼 대관식의 장면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것 같지만, 실제의 모습을 담은 것은 아니고, 그냥 중요 인사들 얼굴 다 넣고, 나폴레옹이 돋보이게 그린 작품이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이 형제간에 싸움이 있어서 그의 형제들과 그 형제들 편을 들었던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불참하였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그의 형제 자매는 물론 어머니도 참석을 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5-07) oil on canvas ; 6.21 m × 9.79 m, Louvre, Paris, France
작품을 자세히 보다 보면 의아해진다. 제목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인데, 정작 묘사된 것은 나폴레옹이 왕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첫번째 부인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려고 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미 머리에 월계관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다.
왜 그러냐고?
여기서 자크-루이 다비드의 눈치랄까 재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원칙적으로는 대주교가 황제가 될 인물에게 왕관을 씌워줘야하는것이 절차이다. 그런데, 가만! 그 장면을 대문짝만하게 남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화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천하의 나폴레옹이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왕관을 부여받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 아닌가. 화가는 고민했을 것이다.
스케치 중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 왕관을 쓰는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그의 고민의 시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엔 나폴레옹이 왕관 수여 받았다 치고, 황제의 지위를 받은 나폴레옹이 왕후에게 왕관을 씌우는 장면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루브르에서 보관중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스케치 중 하나. 여기서는 주교는 얌전히 앉아 있고, 나폴레옹이 호기롭게 직접 왕관을 쓰는 모습으로 그려보고 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이 안은 채택하지 않았고, 완성작에는 나폴레옹이 왕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그렸다.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자크-루이 다비드는 아카데미에서 주최하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미술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로마 상을 받았고, 국비장학생으로 로마에서 5년간 체재하면서 고전을 익힌 작가다. 사실 단번에 로마상을 수상한 것은 아니고 무려 4수 끝에 획득한 상이었고, 그런탓에 아카데미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있었다. 혁명 후, 아카데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그는 그런 아카데미의 개혁을 단행했고, 그의 작풍은 이후 아카데미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했다.
시류를 따라 열심히 살았던 자크-루이 다비드지만, 그가 지지했던 나폴레옹이 실권하자, 귀양도 가면서 고생스런 세월을 보내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된다. 이렇게 쓸쓸한 만년에 그의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든든히 지지를 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사비나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라는 작품이다. 원래 이 주제는 여성의 수가 부족했던 고대 로마군이 사비나에 침략해서 여자들을 데려간 데서 기인한 사건을 그린 내용이다. 수년 후 사비나의 군인이 그들의 여인들을 찾으려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미 로마인들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난처할 수가 없다.
보통 사비나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그릴 때 많은 작가들이 '사비나 여인의 강간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내지 좀 강도를 약하게 하더라도 '납치 (abduction)'이라는 제목을 취해왔고, 로마군이 사비나의 여인들을 납치하는 장면을 주로 그려왔다. 이에 반해, 자크-루이 다비드의 경우, 특이하게도, 한 여성이 로마군과 사비나의 군대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역할로 그리고 있다. 혹자는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서 여성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깨닫게 되어서 이러한 모습으로 그렸다고 한다. 초기의 울기만 하던 무기력한 여성의 모습을 그렸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라 그의 심경의 변화를 읽게 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Jacques-Louis David (1748–1825),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oil on canvas ; 385 x 522 cm, Louvre
참고로 니콜라스 푸생의 작품도 같은 주제로 그린 작품이 있는데, 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대로 이걸로 부셰와 푸생의 차이를 가늠해보시길)
Nicolas Poussin (1594-1665),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ca 1634, 35) oil on canvas ; 154.6 x 209.9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