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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이끈 마리 앙트와네트와 그에 대한 오해들

서양 미술사 /세계사

by 민윤정

서양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리 앙트와네트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위시한 왕실의 사치가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고, 그녀를 위시한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익숙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백성들의 고충을 전해듣자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왕족과 귀족의 생활과 서민들의 생활의 간극과, 지배층의 민중의 생활고에 대한 몰이해를 대변하는 일화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오늘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혹은 악명높은 마리 앙트와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궁정 행사용으로 차려 입은 마리 앙트와네트. Jean-Baptiste André Gautier-Dagoty (1740-1786) Palace of Versailles


궁정 행사용으로 차려 입은 마리 앙트와네트. Jean-Baptiste André Gautier-Dagoty (1740-1786), Portrait of Marie-Antoinette of Austria (1775) oil on canvas ; 160 x 128 cm, Palace of Versailles



하지만, 프랑스 왕실의 재정 파탄은 사실 루이 14세와 15세 때부터 이어진 사치와 방탕의 결과이고,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의 경우, 전대에 비해서 그다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요새는 지배적이다. 그리고, '배고프면 케익을 먹으면 되잖아?'라는 에피소드도 실은 그녀가 마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 어린 거지가 구걸을 하자, '저 불쌍한 아이에게 브리오슈를 주세요.'라는 에피소드가 와전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브리오슈'란 빵 자체도 모닝롤 빵과 페스츄리의 중간 정도되는 고급 빵으로 일반 서민이 먹는 딱딱한 빵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2_Jean-Baptiste_Siméon_Chardin_028.jpg 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1779) Still Life with Brioche (1763), Louvre


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1779) Still Life with Brioche (1763) oil on canvas ; 47 x 56 cm, Louvre


1668년 당시 베르사이유 궁의 모습


그보다 실은 그 에피소드 자체가 허구라고 하는 의견이 요새는 더 지배적이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사치와 백성들의 삶에대한 무관심에 대한 에피소드는 애초에 혁명의 정당성을 피력하기 위해 혁명파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많은 에피소드가 연대적으로 살펴 보면 그녀가 아직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이거나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이기에 시간과 장소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낭설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인 장-자크 루소가 1767년경 썼던 <<고백록 (Confessions)>>의 제4권에 인용되면서 기정사실화되었다고 한다.)


화려함의 끝판왕. 서양의 궁전들 중에서도 그 규모나 화려함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베르사이유 궁전
화려함의 끝판왕. 서양의 궁전들 중에서도 그 규모나 화려함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베르사이유 궁전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1755-1793)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왕후의 15번째 딸로 태어나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불과 14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후 이들의 거처가 된 베르사이유 궁에서 결혼식 연회가 무려 2주에 걸쳐 열렸다고 한다. 결국 호화로운 결혼식과 루이 14세가 지은 에너지 효율 떨어지는 거대한 베르사이유 궁에서 살게 된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결국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프랑스 인이 아니고, 결혼식 당시 불어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애초부터 프랑스인들의 미움을 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녀가 멍청하고 사치스럽고 경박하다는 설은 애초에 그녀를 탐탁치않게 여긴 탓에 생긴 루머라는 것이다.


6_Jacques-Louis_David_-_Marie_Antoinette_on_the_Way_to_the_Guillotine.jpg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처형 직전의 마리 앙트와네트.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처형 직전의 마리 앙트와네트. 밉게 보자면 끝없이 미워보이나보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다른 초상화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난다. Jacques-Louis David (1748-1825), Marie Antoinette on her way to the guillotine (16 October 1793) pen and ink ; 15 x 10 cm, Louvre


Elisabeth-Louise Vigée Le Brun, Marie Antoinette with a Rose (1783)

Elisabeth-Louise Vigée Le Brun, Marie Antoinette with a Rose (1783) oil on canvas ; 113 x 87 cm, Palace of Versailles



이후에 나온 역사서에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실은 총명해서 결혼 당시엔 불어가 서툴렀지만, 곧 불어에 능숙해졌고 몇 개국어 정도는 익혔다는 것,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 밖에서 마주친 농부가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직접 붕대를 감아 치료를 해줬다는 이야기, 화려한 삶보다는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즐겨서 베르사이유 궁 밖 조그마한 농가 형태의 성인 쁘띠 트리아농에서 하녀 복장을 하고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처형당할 때 그녀를 단두대로 이끈 군인의 발을 모르고 밟고나서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에요.'라는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베르사이유 궁의 외곽쪽에 위치한 쁘띠 트리아농의 모습



이처럼 마리 앙트와네트는 큰 성에 사는 아름다운 왕비라는 지위에서 단두대에서 덧없이 사라진 가혹한 운명이라는 드라마틱한 삶 탓에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생산해내고 있고,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 등장하여 우리를 매료시킨다.



내일은 마리 앙트와네트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를 또 살펴보기로 약속하며 오늘 글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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