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큰한 늙은 호박국
(먼저 사진은 단호박죽임을 알림)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 나는 담낭제거 수술을 받았다.
웬만해서는 잘 참는 편이라 이 또한 견딜 수 있겠지 싶었다. 게다가 복강경 수술이라 하니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렸다.
아플 거라 각오했지만, 그렇게까지 아플 줄은 정말 몰랐다.
병원에서 보낸 닷새 동안, 글이나 써보겠다며 챙겨간 아이패드는 열어 보지도 못했다.
사실 패드를 열고 글을 읽고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버겁게 느껴졌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쉽게 축난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잠도 잘 오지 않고, 몇 숟가락 넘기는 일조차 힘들어 하루하루가 길고 서러웠다.
퇴원 후 몇 끼는 죽으로 때웠다.
주로 내가 좋아하는 단호박죽이었다. 노란색 죽 한 그릇을 바라보면 괜히 위로가 된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단호박죽이 그렇게 좋아?”
사실 나는 단호박죽보다 엄마가 끓여주는 늙은 호박국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따뜻하고 달큰한 맛은, 몸이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종의 패턴 같은 것이다.
’ 아플 땐 호박국을 먹어야만 해 ‘ 같은.
딸아이는 “주말에 할머니 집 가니까 끓여달라고 말해보자”라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장 준비로 손이 가장 바쁘고 마음도 분주한 때였다.
그 와중에 호박국까지 부탁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엄마와 통화하면서도 호박국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그 맛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런데 김장 날, 엄마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크게 놀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이미 호박국을 한 솥 끓여두고 계셨다.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는 순간, 마치 얼어붙었던 마음이 뜨끈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늘 그렇다.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마저 들키지 않아도, 내가 필요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그런 엄마의 마음 앞에서 괜스레 웃음이 났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을이면 유난히 엄마의 달큰한 호박국이 그립다.
올해는 몸이 아파 더 그리웠던 그 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맛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호박만 넣고 푹 끓여도 좋고, 팥을 살짝 더해도 고소하고 든든하다.
늙은 호박국 한 그릇에는 엄마의 손맛이,
그리고 말없이 건네는 다독임이 깊게 스며 있다.
그 국물 한 모금이 내 몸을 데워주고, 내 마음에 온기를 되찾아 주었다.
가을이면 나는 또 그 맛이 그리워질 것이다.
아마 평생 그러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