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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Dec 17. 2023

축사, 뭐가 그렇게 슬펐던 건지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머쓱하다

1. 어울리지 않게 키가 크다

2. 무안을 당하거나 흥이 꺾여 어색하고 열없다


편린(片鱗)

한 조각의 비늘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이르는 말.



영자의 결혼식.

영자의 친구 영숙은 축사를 준비해 갔다. 


영자야!

결혼 직전까지 축사를 안 써는 바람에 네 속을 애태웠던 것 같아서 미안하다.

축사를 쓰는 게 정말 너를 어디론가로 떠나보내는 것 같아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뤄왔어.

하루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그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는데, 제 갈 길 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가을이 못내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 그 모습이 마치 네가 결혼한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하루 이틀 계속 축사를 미루는 내 모습 같아서 부랴부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계절이 변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냐만, 봄의 끝자락에 벚꽃이 함박 같이 떨어지는 걸 보면 아쉬운 마음이 네 결혼이 주는 헛헛함이라는 건 의연하게 감춘다고 숨겨지지가 않더라. 

[Original] 아마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네 결혼을 부지런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Original] 남들은 축사를 할 때, 신랑과 신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말하던데, 솔직히 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 처음에는 안 썼는데, "형식을 안 맞출 거면 편지를 쓰지 왜 축사를 하냐?"는 또 다른 어른스러운 친구의 조언에 네 좋은 점을 써봤어.


영자야.

대학교 시절부터 모든 이들에게 보물이라고 불릴 만큼 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 자신과 그런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너의 태도에서 나는 항상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쉽지만은 않았던 20대를 이렇게 잘 마무리해가고 있다. 삶이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냐만, 언제나 구김 없이 웃고 늘 괜찮다고 말하는 너를 진심으로 존경해. 


그리고 무엇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네가 참 좋아. 타인의 행복에 진심을 다해 기뻐해주면서도, 불행에는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네가 있어서 네게 기대는 순간이 참 많았던 것 같아. 작은 바람이 있다면 너만큼은 못되더라도 너한테도 가끔은 내가 조금 괜찮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영자야.

[Original] 돌이켜보면 우리는 대학교 시절 한 몸인 것처럼 지내다가 졸업 이후로는 각자의 삶을 살아왔잖아. 단지 1도 정도 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나온 시간의 길이가 어느새 우리를 이만큼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어. 돌이켜보면 너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참 날카로웠던 사람이었는데, 네가 둥글둥글하게 잘 받아줘서 지금은 그때보다는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Original] 너와 함께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삶에 힘들었던 순간이 참 많았는데, 네 존재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게 눈부신 추억으로 탈바꿈된 것 같아. 그리고 난 지금도 너와 우리 친구들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배짱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어.


영자야.

네 옆에서 너를 위해 온 마음 바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게 너무 다행이야. 그리고 그분이 네 남편분이라는 것도 너무 기쁘다. 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물론 이해할 수 없지만, 남편분께서 너를 언제나 사랑한다는 눈빛으로 봐주시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거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소중한 시간은 그만 빼앗고, 오늘 비로소 인생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너에게 내 온 마음을 다해 너의 행복을 바랄게. 다시 한번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네가 결혼한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참으면서 겨우 마친 축사가 무색하게 우리는 여전히 서로가 저녁을 먹었는지 전화하면서 확인하고, 저녁 먹고서는 배부르다고 침대에 누워서 통화를 하지. 네 결혼식 때 축사하면서 울먹이던 게 참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야. 결혼은 네가 했는데 왜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걸까? 나도 얼른 같은 곳을 바라볼 사람을 찾아야지. 극단적일 수 있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어. 우리도 죽고 나면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을 텐데, 그때도 이렇게 시시껄렁하게 아무런 의미도 담지 못하는 말들을 주고받으려나. 그런데 그 가벼운 말들 사이사이에 베어나는 마음들이 켜켜이 쌓이면 그것처럼 단단한 것도 없을 거야. 


평생에 역작이라고 꼽을 만큼의 훌륭한 글을 써주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안 돼서 속상하지만,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글로 먹고살았지 않았을까? 영자야. 내 삶의 곳곳에 주옥같은 글들을 편린처럼 숨겨놨으니, 네 결혼도 우리 우정도 우리의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유지하면서 보물을 찾듯이 같이 재밌게 지내보자.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해.


너를 정말 아끼는 영숙이가.


사진: Unsplash의 Victoria Priessn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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