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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Aug 25. 2024

저는 할머니를 닮았습니다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닮다

1. 사람 또는 사물이 서로 비슷한 생김새나 성질을 지니다

2. 어떠한 것을 본떠 그와 같아지다


시간의 차원에서, 영겁의 세월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한낱 인간의 삶일지라도 현재성으로 인하여 찰나는 다시 영원이 된다. 이 문장을 다시 공간의 차원으로 치환하여 전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광활한 공간 속 하나의 점에 불과해 보이는 인간의 삶일지라도 현재성으로 인하여 점은 다시 직선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꼭 빼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또 다른 점이 되어 다시 직선으로 그어진다. 그렇게 그어진 직선들이 모이고 모여 직선은 결국 원이 되는 것이다. 마치 끊임없이 추락하는 인공위성이 지구의 공전으로 인해 절대 추락하지 않고 지구를 중심으로 궤도를 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제 사랑은 현명하지 못하여 당신에게 드릴 것으로는 당신께 좋은 것들보다, 당신께서 좋아할 것들, 이 막걸리 4병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당신께 가는 길에는 꽤 경사진 오르막이 있어서 겨울이 되면 그 경사로에서 눈썰매를 타곤 했었는데, 오늘 큰 보폭으로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처럼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제가 두 발 붙이고 서있는 공간들의 부피가 어린 시절보다 수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공간을 차지하는 제 부피가 상대적으로 커진 것이겠지만, 오늘 할머니를 보고 어린아이처럼 울던 제가 자랐다고 말하는 것이 영 어색하여 공간이 줄어든 것이라고 우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당신시간은 바삐 움직이는 제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버려서 당신의 어제와 오늘은 사뭇 달랐습니다. 근육은 사라지고 가죽밖에 남은 듯한 팔다리와 작은 충격에도 몸에 쉬이 멍이 새겨져 보랏빛으로 물든 몸, 걸을 힘이 없어 무릎으로 기어 다니다 생긴 무릎 멍과 굳은살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안에만 있으니 하루와 하루의 구분이 흐릿해졌고, 이제는 너무 아프니 그만 살고 싶다는 당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잘만 나불대는 입으로, 미래의 삶이 가져다 줄 행복이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나이대라 잘 몰랐다는 변명을 하며 철없이 내뱉어볼 어쭙잖은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고통으로 얼룩진 삶은 이미 어머니를 통해 충분히 무기력하게 봐왔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선뜻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당신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흐르는 눈물로 베개를 적셔버릴 수밖에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아버지도 오전 장사를 마치고 가게 문도 닫고 있습니다. 제 부모와 형제, 처자식을 모두 먹여 살렸던 가게는 이제 토요일 오후에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뭇사람들은 우리 가게를 보고 '이제는 배가 불러서 토요일 오전까지만 일한다'라고 손가락질한다지만 그들의 눈에는 제 부모님이 감내하고 있는 세월의 무게가 보이지 않나 봅니다. 오전 내내 일하시다 땀범벅이 되었고, 이내 점심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다시 할머니를 마주합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닮았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돌이켜보니 오늘 제가 할머니댁으로 가면서 걸어올라 간 방향과 달리 할머니를 거쳐 아버지 그리고 제게 이르렀던 시간의 방향은 마치 어릴 적 그곳에서 눈썰매를 타며 내려오던, 세월을 거슬러 내려오는 여정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10년 전쯤 되었을까요? 대학시절 교수님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쏟던 날이 있었습니다. 언제쯤에나 세상이 살기 쉬워지냐는 한탄에 저는 지레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남은 삶은 어머니보다 곱절은 많은 것 같은데 제 삶은 이미 그 순간에도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희망도 기약도 없어진 듯하여 막연함에 정말 서럽게도 울었습니다.


오늘도 저보다 앞서 걸어간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참으로 고단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처럼 두려워 눈물을 흘리지는 않습니다. 삶은 고통이며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은 일종의 사건처럼 일시적이고 간헐적이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걸어 나가야 함을 압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았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제 미래는 당신의 과거 그리고 현재와 다를 것입니다. 당신의 바람이 깃든 미래가 찬란할 있도록, 당신의 소망이 헛되지 않도록 하루하루 더 충만하게 살아갈 테니까요. 꼭 그리 하겠습니다.


왕복으로 장장 7시간 걸리는 거리를 주말마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길에다 시간을 버리는 낭비처럼 느껴지고, 다른 이에게는 독립하지 못한 개체처럼 느껴질지라도 저는 철없이 자주 달려갑니다. 당신의 시간이 너무 빨리 도망가지 않게, 붙잡을 수 있을 만큼만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저는 조바심을 담아 대답하겠습니다.



사진: Unsplash의 Minsoo 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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