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산의 겨울 햇살은 따뜻했다.
산기슭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은 겨울 한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바람은 차가웠다. 하늘로 쭉쭉 뻗어 가지런한 잣나무의 풍채는 누가 키워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는 땅으로 떨어지는 한 움큼의 겨울 햇살 아래로 모여들었다. 따뜻한 겨울햇살이 눈코입 얼굴 근육을 이완시켜 주었다. 43개의 얼굴근육은 겨울 햇살을 받아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풍성한 언어를 표현해 주었다. 타인을 보고 웃을 때나 행복할 때 18개 근육이 힘을 모아 아름답고 편안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장작불을 쬐고 있을 때 드는 그런 기분 좋은 따뜻함이 혈관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두 손바닥을 하늘 위로 올려 지상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볕을 받았다. 손바닥에 핫팩을 올려놓은 듯 서서히 따뜻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바닥 주름진 지문 사이로, 입가의 주름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주위에 모든 것들이 겨울 햇볕을 듬뿍 담아내고 있었다. 시간이나 기억들처럼 형태가 없는 것 까지도 겨울볕의 은혜를 받고 있었다. 겨울 햇살은 봄 향기를 품고 있었고 산기슭은 아직 두꺼운 눈을 덥고 있었다. 입춘의 청태산은 겨울옷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잣나무 향기가 숲내음 속에 깃들여 있었고 얼어붙은 계곡에서 조용하게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바람과 햇살은 서로를 버리지 못하고 시간을 실려 보내주었다.
청태산휴양림 산책길은 사시사철 어느 때 찾아가도 걷기에 좋게끔 만들어져 있다. 우람한 잣나무 사이로 오랫동안 걸을 수 있게끔 나무닥트로 연결해 산책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나무 산책길을 벗어나면 흙길이 나온다. 산기슭을 따라 세네 명이 이야기하며 걸을 수 있는 넉넉한 폭으로 만들어진 자갈길은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내게 해 준다. 제주도 올레길처럼 자연을 품어 담은 한적한 산책길이라서 걷다 보면 편안해져 가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산책길은 완만한 경사로 에스자로 이어져 뻗어 있었는데 겨울에 이곳은 아이들 눈썰매장이 된다. 아이들은 눈썰매 하나씩을 끌고 산책길 언덕 끝까지 걸어 올라갔다. 제법 속도가 붙어 내려오는데도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고랑으로 빠지는 법도 없이 볼슬레가 선수처럼 눈썰매에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보행기에 두 손을 얻고 미끄러운 눈밭을 마치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이마까지 머리를 푹 덥은 보라색 털모자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같은 색깔의 보라색 코트를 걸치신 할머니는 한눈에 뵈어도 꽤나 연세가 들어 보였다. 그 미끄러운 눈길 위를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앞뒤로 부축을 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앞선 여자는 까만 털모자에 까만 뿔테 안경과 빨간 스키복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다. 보행기 몸체에 하얀 줄을 묶어 앞에서 끌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보행기 뒤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여자 역시 붉은색 스키복을 아래위로 입고 있었다. 우리가 서있는 햇볕이 잘 드는 곳까지 올라오려는 듯 보였다. 겨울 햇볕이 움직이자 우리도 거기에 맞추어 조금씩 햇볕이 드는 곳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지인분과 올라오는 할머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가 눈썰매를 타셨을까요"
"설마요 저희도 힘든걸요 이런 데서 넘어지면 어르신들은 대퇴부 다치면 큰일 나요"
나는 작년에 집 앞 얼음길에서 넘어져 입원하신 처남댁 어머님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했다.
언덕길 아래에서부터 다정하게 웃으며 걸어온 행복해 보이는 세 여자가 우리가 서있는 양지바른 곳에 이르렀다.
"엄마 타보니까 어떠셔 재밌어 또 타실래요"
앞에서 끌어주던 검은 뿔 떼 안경을 쓴 여자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보행기 의자에 접어놨던 비닐방석을 접으면서 할머니를 보행기에 앉혀 드렸다. 그제야 할머니의 맑고 초롱한 눈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덥쑥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두 님이 따님이신가 보네요 눈썰매 타신 거예요"
"예 조심 해가며 탔어요 저희 엄마가 올해 92세 세요 "
할머니의 나이를 듣고 우리는 또 한 번 놀랬다. 그 연세에 눈썰매를 타신 할머니의 의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눈썰매를 태운 두 딸들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이 겨울 햇살처럼 따뜻하게 빛나는 듯했다.
할머니는 보행기에 앉아 눈 쌓인 산책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간 스키복을 입은 여자분께 아이들이 타고 있는 빨간 눈썰매 중 한대를 빌려 드렸다. 우리가 가져온 세대의 눈썰매는 우리가 지쳐 있을 때쯤 다른 아이들에게도 빌려 주었다. 아이들은 눈썰매 하나만으로 행복해했다.
할머니가 타신 눈썰매는 아이들이 타는 눈썰매는 아닌 듯했다. 보행기에 접혀있는 은박장판을 넓게 펴서 할머니를 태우듯 했다.
눈이 묻어있는 은박장판이 겨울 햇살을 반짝반짝 튕겨 내고 있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세 모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떤 종류의 풍경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이, 요구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이 연기처럼 인간의 의식과 내면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세 모녀는 웃는 모습이 닮아 있었다. 선한 눈매와 주름은 진하게 자리 잡아 서로의 유전자를 확인해 주는 듯했다. 그들이 나누는 선한 사랑이 농밀하게 응축되어 향기로 퍼져 나가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들의 만들어주는 따뜻함이 확연하게 그곳에 있었다. 순수한 진짜 사랑이었다. 태양빛도, 겨울바람도 눈부신 하얀 눈도 뽀드득 눈 밟는 소리도 모든 존재가 모녀의 사랑을 손뼉 쳐 주는 듯했다.
마치 세분의 천사가 잠시 쉬러 온듯한 모습으로 따뜻한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
"할머니 너무 좋아 보이세요 행복하세요 건강하시고요 "
" 감사합니다 "
" 사진 찍어드릴게요 "
사진 찍어 드릴게요 라는 말을 드리자 할머니는 두 딸 사이로 걸어가셨다. 눈과 입술이 웃고 있었다.
눈길 위로 세명의 천사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따뜻한 겨울햇살이 할머니의 보행기를 비쳐 주었다. 서로에게 기대어 걸어가는 세 모녀의 뒷모습에서 눈부신 광채가 나는 듯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차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우영우가 친구 최수현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마음의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 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에 햇살 최수현이야 "
아마도 할머니에게 두 딸은 봄날의 따뜻한 햇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따뜻 핫 겨울 햇살이 한 움큼 내려앉고 있었다.
은박장판 위에 할머니의 눈썰매는 잊히지 않을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느린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 편의 인간극장을 본듯한 애틋함이 진한 향기가 되어 흩날렸다.
향기 저편엔 시간이 흐름을 잊은 듯, 시간이 없는 듯, 그녀들은 느리게 공간 속을 걸어가 사라져 갔다.
저 멀리 청태산의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