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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Architect Apr 20. 2021

내가 왜 스타트업 scene에서 활동하려고 하는지

스타트업의 사회적/배분적 정의에서의 의미

최근에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어야 정확한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부정 이용하여 차명으로 재산을 증식시킨 것은 거의 사실로 보인다. 국민들은 이에 분노했다. 근데 몇몇 사람들의 분노의 이유는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정의를 저지른 것'이 아닌 '사실 내가 그 자리에서 한몫(?) 해 먹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부정 투기를 한 LH 직원이 '법의 심판을 받겠지만 국민들은 나에게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나의 근로소득으로는 더 이상 서울에서 30평 남짓 보금자리 하나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 서울에서 집 한 채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원래 세상은 너무 많은 것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데(건물주 아들로 태어난다든지, 갑자기 조상의 땅이 수용지역의 옆이 된다든지), 일반인들은 우연히 3루에 태어난 그들은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3루에서 태어나지 못했기에 내 운명을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 나무 배트보다 반발력이 좋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고 근육을 강화하는 약물을 조금 먹은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1루 정도라도 남들보다 빨리 진루하려고 한 것이다. 심판이 3루에서 태어난 자들을 적어도 1루, 2루로 돌려보내든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거나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을 정확히 가려내고 엄격하게 퇴출해야 함에도, 그렇게 못하는게 현실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깟 부정을 조금 저질렀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받을 일이냐? 이렇게 불공정한 게임에서 사실 너네들도 그 정보를 알았더라면 나처럼 부정한 행동을 할 확률이 더 높지 않으냐?" 라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할 것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을 이토록 이기적이고도 무기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구조를 탓하고 싶다.


'최후통첩게임'이라고 있다. 내가 10만 원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그중 일부분을 떼어 주었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둘 다 10만원을 나눠갖게 되고, 상대방이 거절하면 둘 다 못 갖게 되는 게임을 말한다. 학자들의 실험 결과, 단발성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6~7만원 정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3~4만원 정도를 제안하였을 때 상대방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즉, 인간에겐 내재된 공정성에 대한 감정이 있는 것이다. 사실 주류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경제적 인간"이라면 내가 9만9천원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1천원을 제안해도 그 상대방은 1천원을 수령해야만 한다. 상대방은 0원보다 1000원을 선택할 때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 공정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간은 3만원 이하로 제안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거절한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발성 게임이 수십 번의 반복 게임이 되고, 제안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십 번 게임이 반복되면 부정의한 구조에 굴복하여 10원을 제안받더라도 그 10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경직된 구조를 강화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지워버리는 부정의한 룰은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정의'에 대한 신성한 관념도 무기력하게 지워버린다.


작금의 현실이, 최후통첩게임에서 금액을 제안하는 자가 늘 고정되어 있는, 무기력한 구조가 고착화된 상황이 아닐까? 근로소득으로 서울에서 자가를 마련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혹자는 개천에서 용을 내자고 사법고시 부활을 주장하지만 이는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척하는 포퓰리즘 주장에 불과하다. 법조인이 된다한들 변호사 3만명시대에 흙수저 법조인보다 건물주 아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할 확률이 훨씬 높다. 이제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어느 집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앞으로 서울의 집값 상승은 비가역적일 것이다. 이제는 평범한 노력, 조직에서의 성장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시대는 지났다. 기성세대들은 요즘 친구들은 회사에 로열티가 없다고 말하지만, 옛날에는 로열티가 '밥'먹여주고 '집'도 사줬다. 하지만 이제는 그 로열티가 '밥'도 '집'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회의 공정한 룰, 배분적 정의가 작동되지 않아서 발생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배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scene이 존재한다면 믿겠는가? 바로 '창업', '스타트업' scene이다. 물론 이쪽 scene도 고학벌, 금수저가 출발선 상에서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집념과 노력, 열정으로 그것을 뒤집을 가능성이 명백히 있다. 스타트업 scene은 only one,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때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성장하면 그 과실로 '부'도 거머쥘 수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문제 해결에 대한 집념, 사회에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제공하겠다는 마음, 그리고 소비자의 needs에 기민하게 반응하여 변화를 거듭하는 실행력을 보여준다면, 최후통첩게임에서의 '제안받는 자'에서 '제안하는 자'로 game changer가 될 수 있다. 김봉진 의장 등 소위 흙수저 출신 CEO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회사 경영과정상 어느 누군가의 이익을 침해하고 치열한 전투와 전쟁을 거쳐 거기까지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scene이 정직한 부분은, 엄청난 노력과 운이 만나면 확실한 대가는 주어진다는것이다. 그 대가로 정말 본인이 원했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법조계에 들어올 때 내 가슴을 설레게 한 문구가 있다. 헌법 전문의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게 하여"라는 구절이다. 스타트업 씬은 적어도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씬임은 분명하다. 그 대가가 확실하게 주어지는 곳이다. 한편,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게 함으로써 '기회를 균등히'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도서산간 지역에 사는 소외계층 아이에게 컴퓨터 하나를 주려고 해도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실행하고 그 결과를 감사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 1년 이상이 소요되고 결국 불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봉진 의장은 자신의 재산 5000억을 기부한다고 발표한 다음 며칠 후 도서산간 지역에 있는 아이들에게 노트북을 기부하기로 바로 결정 내렸다.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한 성공한 기업가가 기회를 균등히 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스타트업의 경제적 효과도 어마어마 하지만 나는 스타트업이 사회적, 배분적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평생 먹물로 살아온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전 이 scene에 들어와서 초심자로 배우고 성장해왔고, 이제 스타트업 전문변호사로 도약하고 있다. 법조인이 될 때 나를 매료시켰던 헌법 전문의 문구를 한번 더 되새기며 스타트업 scene의 player로서 뭔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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