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혹은 꽁트
낯선 번호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스팸문자라도 그 이름만으로 설레었다.
“오랜만에 연락하네. 나 김세정.”
짧은 문장 하나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37년 전 겨울로 빠르게 공간이동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1984년 1월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았던 것이. 오정동 고갯길을 오르는 눈길은 미끄러웠다. 우리는 김수영의 시 <눈>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걸었다. 나는 일종의 상황극처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는 시의 한 구절을 콜록거리며 읊었다. 어설픈 연기에도 그녀는 해맑게 웃어주었다. 가지런한 이가 눈부셨다. 걷다가 가끔은 서로의 어깨가 닿곤 했다.
멀리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일 때쯤 나는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른 뒤 그녀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밝은 얼굴에 나는 자신감을 얻고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혹시 미끄러워 넘어질까 해서.”
떨리는 내 목소리를 눈치챘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빙판이라 잘못하면 미끄러지겠네.”
손을 잡아도 좋다는 화답으로 들렸다. 가볍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얀 눈길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랐지만 그녀의 골목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걸음을 늦추었고 그녀도 느린 보폭으로 걸었다. 손을 잡고 골목길로 접어들기까지 1분 남짓 지났을까. 갑자기 그녀가 손을 뿌리쳤다.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골목 끝에 그녀의 엄마가 서 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뛰어갔고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그해 봄, 그녀는 대전을 떠나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눈길을 걸었던 그 날이 그녀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인사도 없이 헤어져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골목 입구에서 깜박거린 가로등이 운명의 신호였다는 것을, 그녀와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세정이가 연락해 왔다는 사실을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같이했던 상태와 진욱이에게 전했다. 상태가 단톡방을 만들어 말을 걸어왔다.
“왜 우리랑 같이 만나자는 거지?.”
다소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거야 세정이랑 둘이 만나는 게 쑥스러우니까 우리를 들러리로 함께 하자는 거지.”
진욱이는 시큰둥했지만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그게 아니라 너희들 안부도 물어보더라고. 그때 그 학교 문예부 친구들이랑 자주 만나서 서로 웬만큼 알잖아. 그래서 같이 보자고했지.”
얼마 전 명예퇴직하고 고깃집을 낸 윤철이네 식당에서 만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뒤늦게 단톡방에 들어온 윤철이는 상기된 말투였다.
“세정이가 거기 문예부원 중에서 가장 예뻤는데 지금은 늙었겠지.”
“그럼, 누구는 머리 빠지고 배 나오는 사이에 그 친구라고 안 늙었겠어?.”
“아마 호호 할머니가 됐을 수도.”
“가게 한구석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잘 마련할게.”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은 연락이 온 이틀 뒤였지만 두 달을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만나는 날 아침, 도루코 4중 날 면도기로 수염을 깎다 순간 움찔했다. 마음이 급했던지 턱 아래를 베었다. 핏빛이 약간 비칠 정도였다. 불길한 느낌이 몰려왔다. 운수나 징크스를 믿지는 않아도 피를 보고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일 년에 한 번도 양복을 입지 않는 놈이 그래도 세정이가 등장하는 게 대단한 사건이긴 한 모양이네.”
“얘는 우리 딸 결혼식 때도 잠바 입고 왔는데, 너 오늘 맞선보러 나왔냐?.”
상태와 진욱이의 농담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윤철이네 식당은 한가로웠다. 종업원이 스마트 폰을 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잘 차지 않던 손목시계를 봤다. 바늘은 6시 10분을 가리켰고 그녀와의 약속시간은 이십 분 남았다. 그녀를 만난다는 반가움이 컸지만 넷이 함께 만난 지도 오랜만이라 우리는 서로의 자잘한 안부를 물어봤다. 시간은 더디게 지나 갔다.
“우리 목이나 축일까?.”
상태의 말은 내 목덜미 긴장을 풀어주기에 적절했다.
“그래, 고기는 이따 세정이 온 다음에 먹고 우선 시원하게 소맥 한 잔 말아보자고.”
진욱이의 대답은 즐거웠고 윤철이가 따라주는 술은 정다웠다.
가게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소맥 세 잔을 들이켰을 때쯤 시계는 6시 28분을 가리켰고 문이 열리는 벨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고개를 돌렸다. 세정이였다. 그녀는 우리 일행을 보고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손이 얼굴을 반쯤 가려 표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유난히 길었던 손가락은 37년 동안 조금도 줄지 않아 보였다. 2초쯤 지났을까 걸음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 왜 나가지?.”
“화장실 갔다 오려나 보네.”
1분이 지나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2분이 지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테이블 위를 떠도는 적막감 속에서 술잔을 들었다. 마른 목젖을 타고 술이 흘러 들어가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카톡 알림음이 들려왔다. 오케이 목장의 결투에서 조심스럽게 권총에 손을 가져가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나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냈다. 예상대로 그녀의 문자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요즘 네 명 이상 모이면 안 되잖아. 다음에 보자.”
입장과 동시에 퇴장한 그녀의 문자를 전하자마자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듯, 급기야 식당주인 윤철이가 빈 불판 위의 안주가 되기 시작했다.
“윤철이 니가 여길 왜 앉아있어서 4인용 식탁을 만든 거냐고.”
“식당 주인이면 계산대 앞에 있거나 주방에 있어야지 왜 여길 앉아서 황당한 상황을 만드냐?.”
“너 얘가 양복입은 거 한 번이라도 봤어? 세정이 생각해서 양복 입고 온 거잖아. 이런 마음을 불판에 삽겹살 굽듯이 그렇게 지지면 되겠냐. 생각 좀 하고 앉았어야지.”
“이거야말로 37년 만에 보는 최고의 블랙코미디다. 내가 앞으로 코로나블루의 가장 비극적인 사례로 오늘 이 장면을 학계에 보고를 할거다. 누가 시켜주기라도 하면 프리젠테이션 발표도 할 수 있어.”
윤철이를 향한 거센 비난은 그녀가 나간 후 삼십 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말없이 술잔을 들이키던 윤철이가 종업원에게 한우 토시살을 가져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고깃집 사장의 목소리는 텅 빈 식당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고기 좋아하는 상태가 윤철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마디 던졌다.
“그래도 윤철이가 착한 애야. 너무 그러지 마라. 얘도 반가운 마음에 잠깐 앉았는데 그때 세정이가 들어온 거잖아. 윤철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 가서 그 비싼 한우를, 그것도 가장 비싸다는 토시살을 얻어먹냐. 120 그램에 4만 5천 원짜리를.”
나는 연신 잔을 들었고 손으로 반쯤 가린 그녀의 얼굴은 더욱 희미해져 갔다. 밖에는 눈이 내렸고 잔을 들 때마다 입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날은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마지막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동명이인 김세정 배우가 출연하는.
-<굿모닝충청> 에 연재하는 콩트 다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