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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재 Apr 01. 2021

도긴개긴

-콩트 혹은 꽁트

“선배님, 김 팀장 파마한 거 보셨어요? 아줌마 같아요.”

컴퓨터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계는 9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시만 넘었어도 웃으며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를 했을 텐데 부족한 3분이 인내심을 꺾고 말았다. 

”너는 아침부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내가 마수걸이 손님이 여성이라고 타박하는 늙은 장사꾼은 아니지만, 또 첫 손님부터 카드냐고 투덜대는 구멍가게 칠순 노인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냐. 열 시도 안 됐는데.”

후배 녀석은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 10시가 무슨 상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후배는 눈만 껌벅였다. 

“너는 그런 눈치로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상대방이 파마할 머리카락이라도 있는지 확인을 하고 말을 해야지. 내가 말이야 머리카락만 많아도 아줌마 소리를 평생 듣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야. ”

내가 민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며 말하자 녀석은 발걸음을 뒤로 뺐다.

“아. 제가 깊은 상처를 드렸군요. 아침 10시도 안 돼서.”

“넌 나에게 큰 상처를 줬지. 사실 말이야 상처라는 게 마음의 상처가 더 큰 법이거든, 너 여기 와서 앉아봐.”

“아니, 제가 지금 바빠서.”

눈을 크게 뜨며 다소 화난 표정을 짓자 후배는 뒷걸음을 멈추고 자리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빈 종이 한 장과 볼펜을 꺼내 후배 앞에 놓았다.

”숙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

”좀 어리숙할 때 쓰는 말 아닌가요?.”

“그렇지.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기도 하지. 원래는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숙맥불변에서 나온 말인데, 반성하는 의미에서 여기다 콩 숙 보리 맥을 한자로 써봐.” 

후배는 한숨을 쉬는 동시에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선배님, 어제 술 드셨죠?. 점심에 얼큰한 동태탕, 아니면 짬뽕 어떠신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점심을 얻어먹자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김 팀장이 머리카락을 볶은 덕분에 메뉴를 자신 있게 고를 수 있었다. 대머리를 앞에 두고 파마를 거론한 후배는 숙맥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급기야 점심까지 사게 됐다. 나는 짬뽕과 군만두, 동태탕과 라면 사리를 저울질하며 속이 풀어지는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동태탕 국물을 작은 그릇에 따라 세 번쯤 들이부었을 때쯤 였을 것이다, 머리에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관정이 뚫린 듯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름에 냉면을 먹어도 땀이 나는 체질이라 매운 것을 먹으면 땀으로 목욕을 할 때가 많다. 

“머리에서 땀방울이 많이 난다는 것은 모공이 막혔다는 것은 아닌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숱이 없는 게 이상하다. 지금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침에 숙맥 때문에 점심을 사게 된 후배는 탈모 시리즈 2탄을 이어갔다. 

“그렇죠. 모공이 열려있으면 머리카락이 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일주일 말미를 줄 테니까 산으로 들로 돌아 댕겨서 발모 비법을 찾아와 봐. 이번에는 한자로 써보라고 안 할 테니까 충북 어디에 있다는 대학병원, 경기도 어딘가 용하다는 시골약국, 산성동에 있는 내과, 이런 데 말고.” 

“제가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을 찾아오면 한턱 쏘는 겁니다. 그리고요. 한자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다른 후배들한테는 갑자기 한자로 써보라는 얘기 좀 하지 마세요. 그 친구들 고등학교 대학교 다녔어요. 서당 다닌 애들 아니라고요, 그러다가 완전 꼰대 소리 들어요.”

 

 머리카락이 빠른 속도로 빠지기 시작한 것은 마흔을 갓 넘어서였다.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명성이 자자하다는 독일샴푸, 어성초와 약초 몇 가지를 섞은 발모제, 하다못해 장터 노점에서 한 개에 5만 원이나 하는, 이름 자체가 머리나는 비누라고 골판지에 매직으로 쓴 도무지 성분을 확인하기 힘든 제품까지. 다양한 발모제와 민간요법을 시도했지만 풍성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한 번은 시골에 성묘하러 갔을 때 무덤 옆 측백나무 열매를 채취하느라, 상 차리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한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측백 열매를 소주에 담가서 몇 달 뒤에 바르면 발모촉진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그다지 신뢰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 측백 열매 술을 머리에 바르다 마시다를 밤이 늦도록 반복하다가 다음 날 점심까지 술이 깨지 않은 기억도 있다.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며 한약을 권하는 이도 있었고, 까만 콩이나 흑임자를 많이 먹으라는 방앗간 아저씨의 조언 역시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나올 무렵 카톡 알림이 울렸다.  

“그날, 과연 세정이가 코로나 때문에 그냥 돌아갔을까?.”     

   37년 만에 만나 2초 밖에 얼굴을 보지 못한 김세정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뒤돌아 나간 게, 코로나 방역지침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은 윤철이였다.

 

 세정이를 만나기로 한 날. 인원 구성은 나, 진욱, 상태 그리고 세정이를 포함해 사적 모임에 저촉되지 않는 네 명이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윤철이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판단의 오류였다. 그날 윤철이가 애꿎은 비난의 화살을 맞은 후유증이 컸는지 문제 제기는 제법 진지했다. 카톡 문자를 보고 난 이후,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이하드 1편에 나오는 부르스 윌리스가 멋지냐? 아니면 5편에 나오는 게 더 멋지냐?.”

윤철은 먼저 도착한 나에게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야 5편이 제일 낫지, 그 형은 나이 들더니 더 멋있어져.”

“혹시 그 이유가 머리카락 때문은 아닐까. 부르스 윌리스 형이 1편에 나왔을 때는 좀 듬성듬성 빠졌지만 5편에서는 탈모가 완벽하게 진행됐잖아. 오히려 삭발한 것 같은 중년의 모습이 더욱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닐까. 대머리인 너한테 더욱 몰입감을 주지 않았는지.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냐?.”

  탈모 시리즈 3탄은 뜻밖에도 윤철의 입에서 나왔다. 답변을 정리하는 사이에 진욱이와 상태가 도착했다. 윤철이는 그날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며 앉은 자리도 그때와 같이 배치했다. 젊은 여직원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윤철이는 버버리코트만 입지 않았지 형사 콜롬보를 연상케 했다. 그는 직원에게 당시 세정이가 들어왔을 때처럼 자세를 취해보라고 했다.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걸음을 멈추자 윤철이가 입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직원을 바라보고 손끝은 나를 가리켰다.

“거기서 얘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뭐지?”

“그 아저씨는 대머리가 빛나요. 빛나도 너무 빛나요. 눈부셔요. 바로 위 조명도 있잖아요”

젊은 여직원은 즐거운 말투였다. 불러서 조명을 한자로 써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밀려왔지만, 그럴만한 권한이나 관계가 있는 게 아니어서 슬그머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예 전등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네. 어쩌면 이렇게 빛나냐.”

진욱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자 이번에는 윤철의 손이 진욱을 향했다.

“그 아저씨는 배가 너무 나왔어요.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아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것 같은데요.” 

 우리의 시선은 일제히 부풀어 오른 배를 향했고 진욱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뱃살의 수축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럼 얘 상태는 어때?”

“아까부터 거슬렸는데요. 젓가락으로 이빨은 왜 쑤시는 거예요?”

직원은 얼굴을 구기며 진지한 배우의 표정을 지었다. 뱃살을 한껏 밀어 넣었던 진욱이가 말을 꺼내자 다시 배가 튀어나왔다.

“상태 너는 말이야. 내가 예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 밥 먹을 때 이 쑤시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 사장님은 구두 구겨서 신지 마시라니까요. 동네 건달처럼 보여요. 명색이 사장님인데.”

젊은 종업원은 묻지도 않은 답까지 했다. 윤철은 손짓으로 그만 됐다는 표시를 했다.     


  우리는 4인용 테이블에서 말없이 술을 따랐고 잔은 부딪히지 않았다. 네댓 잔이 돌았을까. 진욱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독백처럼 한마디씩 내뱉었다.

“세정이가 내 뱃살을 봤을까?.”

“이 쑤시는 거는 멀리서 잘 안 보일 텐데.”

“눈부셔서 못 알아봤나, 모자라도 쓰고 나올 걸.”

윤철은 콜롬보 역할을 끝내지 않고 또 다른 과제를 던져주었다. 

“그게 이유라면 살아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단지 이유가 그뿐이었을까?”

잠시의 침묵과 취기를 깨운 건 누군가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였다. 

“오늘 술값은 머리 빠진 놈, 배가 공 같은 놈, 이 쑤시는 놈. 어떤 놈이 낼 겨?”     


* <굿모닝충청> 연재글을 재수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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