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혹은 꽁트
두 잔을 마신 날이나 두 병을 마신 날이나 어김없이 집에 들어간다. 아파트 앞 바닥에 깔린 보도블록의 줄을 따라 똑바로 걷을 수 있는 날과 줄이 희미하게 보이는 날의 엄청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스크 안에서 감도는 술 냄새에 다시 취할 정도로 마셨을까. 현관문 번호키를 세 번에 걸쳐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늘 누르는 잠금장치가 왜 술만 마시면 헷갈리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으려는 순간 짧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버리고 들어와.”
문장에 주어가 빠져있어도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그것은 사무적인 지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발을 벗는 지점에서 불과 한 발짝 남짓 떨어져 있는 쓰레기봉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음식물 쓰레기통이 놓여있었다. 취한 몸을 재빨리 침대에 눕히려고 했던 의지는 금세 풀이 꺾였지만, 내일 아침에 버린다느니, 조금 있다 버린다느니, 이런 대답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쓰레기봉투는 묶여있지 않았다. 그것은 묶어서 버리든지 더 첨가해 버리든지 알아서 판단하라는 신호였다. 봉투 끈을 여미어 묶으려 하는데 다소 헐렁한 느낌이 들었다. 신발장에 잘 모셔져 있는 떨어진 신발을 넣기로 했다. 여러 차례 버리려 하다 매번 잊어버려 6개월 넘게 냄새를 풍기고 있는 신발이다.
봉투에 낡은 운동화를 넣고 나니 묶는 끈이 상당히 짧아졌다. 손으로 쓰레기를 누르며 묶기에는 불편하고, 쓰레기가 다시 부풀어 올라 할 수 없이 발을 쓰기로 했다. 적당한 압력으로 누르고 묶는 것은 오랜 내공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쌓은 내공이 소주 두 병을 견딜 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과감하게 시도를 했다. 발을 들어 비닐봉투를 누르고 두 손으로 끈을 묶으려는 순간 충분히 짐작한 일이 발생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압력은 높아졌고 급기야 봉투가 찢어졌다. 한 뼘 이상 찢어진 중상에도 불구하고 봉투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차라리 긴 신음은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거실까지 신음이 들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재빨리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책꽂이 선반에 놓여있는 투명테이프를 가지고 나왔다.
쓰레기봉투를 테이프로 붙인 경험이 여러 번이라 술 취한 손도 능수능란했다. 아파트에서 쓰레기봉투 수선하는 일을 공개 모집하면 아마도 내가 1순위로 합격할 수 있을 만큼 축적된 능력이 있었다. 테이프를 이빨로 손쉽게 자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쓰레기봉투가 서 있고 울룩불룩한 상태라서 주정뱅이가 빠른 속도로 손을 놀리기엔 난이도가 중급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세로로 한 번 혹시나 해서 가로로 한 번 붙여야 엘리베이터에서도 안전하게 들고 갈 수 있다. 테이프로 봉합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한 손엔 쓰레기봉투를 또 한 손엔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한마디는 감수해야 했다.
“쓰레기봉투 아끼듯이 술값을 그렇게 아껴보셔.”
절대로 뒤돌아보며 대꾸를 하면 안 되는 상황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조용히 열고 살며시 닫으면 더 이상의 분쟁은 생기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14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주민이 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스크를 고쳐 썼다. 5층에 선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열리자 14층 아저씨가 들고 있는 재활용품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마누라가 다리를 다쳐서….”
묻지도 않았는데도 14층 아저씨는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눈길에 나가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구태여 나가더니 미끄러져서 인대가 부었다나 늘어났다나. 하여튼 마누라 쟁이는 내 말을 안 들어 먹어.”
나보다 예닐곱 살쯤 많아 보이는 14층 아저씨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이어가며, 자신이 재활용품을 버리게 된 사연을 큰 소리로 웅변하듯 호소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한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 떨어진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건 절대로 안 버려. 그건 마누라 소관이지.”
14층 아저씨는 내가 들고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쳐다보며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요즘에 살림하는데 남녀 구별이 어디 있어요? 양성평등 시댄데.”
“어허, 이러니 세상이 큰일이지.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젊은 남자 애들이 지지배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지 않나, 식당에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사내놈들이 숟가락 젓가락을 떡하니 놔주지 않나. 이러다가는 앞으로 지지배들을 다 업고 다니겄어.”
양성평등에 대한 말을 다시 꺼내면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쓰레기처리장으로 향했다. 14층 아저씨가 플라스틱과 캔을 분리해 버리는데 시야에 거슬리는 장면이 목격됐다.
“재활용품 버릴 때 생수병에 붙어있는 라벨은 떼어서 버려야 되는데.”
“뭐, 이 상표를 다 떼라고. 그런 게 어딨어. 이렇게 분리해서 버리는 것만 해도 어딘디.”
“작년 말부터 라벨을 따로 떼서 버리는 투명페트병 분리배출이 의무화됐거든요.”
“하여튼 갈수록 세상이 복잡해져. 별걸 다 의무라고 그런댜.”
14층 아저씨는 투덜대면서 라벨을 떼었다. 나는 상표를 다 떼라는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궁시렁대는 아저씨의 푸념은 계속됐다.
14층 아저씨를 다시 만난 것은 이틀 뒤 밤이었다. 그날도 소주 두 병의 음주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14층 아저씨가 내렸다.
“사모님 다리 다친 데는 어떠신가요?.”
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14층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슬그머니 뒤쪽으로 숨겼다. 숨겨도 보일 만큼 큰 골프용 가방이었다.
“어디 가세요? 밤늦게.”
“아무 것도 아녀. 산책 좀 가려고.”
“다 늦은 밤에 산책을 다니시고, 암튼 조심하세요.”
14층 아저씨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저씨는 커다란 가방을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술은 어른들한테 배워야 버릇이 잘 든다는 훈계부터 시작해, 젊었을 때 소주 열 병을 마시고 꼿꼿하게 지게를 지고 갔다는 허풍까지 풀어놓을 사람이 오늘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14층 아저씨의 소심한 행동이 궁금해 아파트 입구로 다시 나가 몰래 걸음을 살폈다. 아저씨가 향한 곳은 쓰레기장이었다. 센서 등이 켜진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아저씨는 주위를 여러 번 살펴보며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보였다. 그곳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아저씨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고 작은 통에 담긴 내용물을 붓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한두 번 버려본 솜씨가 아니었다. 다시 통을 넣고 가방을 잠그는 데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아니, 왜 안 들어가고?.”
아저씨는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마땅찮은 말투였다.
“술이 들깨서 밤공기 좀 마시고 들어가려고요. 같이 들어가시죠.”
14층 아저씨는 서둘러 들어갔고 나는 뒤를 따랐다.
“사모님이 다리 다치셔서 아저씨가 많이 불편하시겠네요.”
“할 수 없지 뭐. 인자 살살 집안은 댕길 정도가 돼서 다행이구먼.”
“그나저나 그동안 집안에 음식물 쓰레기도 많이 쌓였겠어요. 사모님이 불편하셔서.”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곤혹스러운 듯 좁은 엘리베이터 주위를 살펴보더니 벽에 붙어있는 세정제를 누르고 손바닥을 비볐다.
“암튼 밖에 나갔다 오면 가장 먼저 손을 씻거나 손 세정제로 소독해야 코로나에 안 걸려”
아저씨는 성급히 말을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서자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꼬리를 흐리며 한마디 날렸다.
“음식물 쓰레기를 잘 버려야 엘리베이터에서 냄새가 안 나는데.”
집에 들어와 욕실에서 손을 닦는데, 얼마 전 37년 만에 만나 2초가량 본 김세정의 희미한 얼굴이 스친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14층 아저씨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 세정제를 말하는 순간 세정이란 이름은 기다렸다는 듯이 떠올랐다. 주변에 수많은 세정이가 있는데 왜 그동안 김세정은 만나지 못했을까. 남자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골프가방에 쓰레기통을 숨긴 14층 아저씨도 잊지 못할 세정이나 추억의 김 마담이 있을까. 수돗물 소리가 길게 이어졌는지 뒤통수를 때리는 말이 들려왔다.
“수돗물 틀어놓고 양치하지 말라고 했지.”
- <굿모닝충청> 연재글 재수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