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꽃 향기는, 뭐랄까? 바닐라 향 같기도 하고, 또는 그것처럼 달콤한 향으로 기억된다.
왜, 향기는 기억으로 남지 않는 걸까? 기억하려 해도 그 순간을 빠져나오자마자 휘발돼버리는 1차원적인 후각을 탓할 수도 없다. 그저 미련스럽게 향기를 맡고 또 맡아보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향기는 기억 속에 각인되지 못한 채 휘발돼버린다.
2020년 2월의 아직 추운 겨울의 끝자락에, 3만 원짜리 커피나무를 덜컥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새 순이 나고, 여린 가지의 목질화가 진행되면서 잎자루 끝에 쌀알 같은 것들이 부풀더니, 이내 꽃이 되었다.
부지런히 물시중을 드는 가운데, 하나 둘 반들반들한 새잎이 나왔다. 올리브 그린의 자태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작물의 자존심을 제대로 세워준다.
직설적이지 않고 요란하지 않지만, "나 이런 몸이야! 알고 있니?" 라며 거만을 떠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제법 야무진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튼튼한 나무가 될 거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될 성 부른 나무는 떡 잎부터 알아본다.'라고.
꽃 진 자리가 볼록해지더니 기어이 초록의 몸을 불린다. 오로지 인내로 점철된 기다림의 시간!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커피나무의 생체주기를 제대로 알 리 만무하고, 꽃이 피고 열매가 굵어지기까지 계절이 어떻게 변해갔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로부터도 열매가 익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초록의 열매가 몇 달째 붉어질 기미가 안 보여서 마냥 기다리는 게 맞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진짜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 기약없는 기다림마저도 무심해지려던 어느 날, 물을 주려다 보니 열매 하나가 연노랑 빛을 띠고 있었는데, 드디어 익으려나 보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모든 열매가 새빨갛게 익었을 때는 커피체리를 따는 게 정말 아까울 정도였지만, 더 이상 두면 이 빨강에 대한 올바른 처사가 아닌 것 같았다.
태양을 피하고 싶지 않아서 며칠 동안 창가에서 태양과 맞짱을 떴다. 서서히 달궈져 가는 빨강을 볼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탱글탱글하던 과육은 강한 햇빛 아래서 부피를 줄여갔다. 새빨강의 비비드 한 색감은, 대추가 말라가듯, 태양초가 말라가듯 차츰 검붉게 변하며 없던 주름도 생겨났다.
행여 하나라도 소실이 생길까 봐 그야말로 노심초사, 애지중지 하며 딱 1주일 정도를 햇빛 드는 창가에 놓아두고 말렸다. 그러고선 여전히 부족할지 몰라 그늘에서 다시 1주일 정도를 더 말렸다.
겉은 딱딱하고 속은 꾸덕한 열매를 까서 드디어 그린 빈(생두)과 조우했다.
생경하기만 한 커피체리에서, 100% 수작업(당연하지 않나?)의 과정을 통해(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무농약 생두(점입가경일세!)를 얻기까지의 모든 순간이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이 자그마한 생두로 최적의 로스팅을 할 자신은 차마 없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그냥 자연의 수순에 따라 무난하게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까지 만이라면 그간의 노고가 아름답게 포장이 되지만, 로스팅을 잘못해서 새까맣게 태워먹는다고 하면, 기껏 할 일 다 해서 거둬놓고 결과적으로 제로의 상태가 돼버리는 것이다. 제대로 폭망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지 허망하지 않을까?
나는 그 허망함 앞에서 태연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나의 첫 커피 수확기는 뭔가 있어 보이게, 딱 여기에서 멈추려 한다.
어렵게 얻은 금쪽같은 그린 빈을 그런 식으로 허망하게 잃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눈이 닳도록 매일매일 살펴가며,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었다. 꽃이 지고 나서부터는 작은 변화라도 찾아보려고 보고 또 보고, 행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섣불리 만지지도 못했던 날들까지도.
고작 스물세 알의 적은 소출이었지만,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기르면서 느꼈던 설렘과 기쁨들에 비하면 그 정도도 너무나 큰 수확이었다.
합리적인 핑계이긴 하지만 그런 값진 시간들의 결과물인 그린 빈을, 로스팅해서 갈아 내린다고 해도 한 잔도 안 될 게 뻔한데, 손품 팔아가며 신기해했던 경험은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