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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선 Aug 23. 2023

자우림

취향에 대해서

나는 자우림의 노래를 중학생 때 노래방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자우림의 노래가 여학생 모두의 18번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노래방에 가면 자우림의 노래를 몇 곡씩 불렀다. 일탈과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그리고 당연히, 매직 카펫 라이드를. 한 번도 자우림이 부르는 원곡을 들은 적은 없었다. 김윤아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그때까지 원곡을 찾아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지.) 멋진 목소리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우림의 노래들이 내 취향은 아니었던지라 그게 다였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우림을 좋아하게 됐다. 김윤아의 첫 솔로곡 야상곡에는 정말이지 푹 빠졌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의 음악 취향은 그 당시 내가 만나던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까 내 음악의 역사는 내 사람들의 역사와 같다고 보아도 된다. 이 노래를 들으면 이 사람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식. 나중에는 음악 하는 사람과 친해지면서 뭔가 그 사람과 그녀의 주변인들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음악들만이 진정 들을만한 노래라는 어떤 기준이 생겼다. 그것이 결혼 전 나의 대인관계 여정의 거의 마지막이었고, 그래서 그때의 노래들이 내 음악의 역사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서 동요와 뽀로로와 코코멜론, 그리고 디즈니 OST를 듣는다. 아! 이것도 내 사람들의 역사의 연장선이구나.)

오늘 오랜만에 자우림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들의 노래를 듣지 않은 거지? 생각했다. 자우림을 좋아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하고 대답했다. 자우림은 다른 누구의 영향 없이 “내”가 좋아서 들은 몇 안 되는 가수들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취향이 부끄러웠다. 아무도, 어떤 전문가도 내 취향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내 취향의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직 채점하지 않은 시험지를 내보이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내 취향을 어떻게 판단할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음악에 조예가 있지도 않으면서 음악 취향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내게 예술적인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고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다른 모든 예술 분야에도 어떤 타고난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있다. 허세라기보다 앞서 말한 두려움에서 나온 자의식이다.

동시에 나는 과거의 나와 연관된 모든 것을 조롱하는 버릇이 있다. 그때의 내가 너무 초라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뭘 몰라도 한참은 몰랐던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끝없는 자기부정이다. 나를 지우고 또 지우는, 지우개를 든 시지프스다. 자기부정은 의심을 낳는다. 나에 대한 의심은 끊임없이 나를 잠식한다. 나의 기억을 의심하고, 지금 나의 감정을 의심한다.  기억을 의심하니 나의 과거가 의심되고 종국에는 그 과거로 쌓아 올린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의심이 다시 자기부정을 낳는 것이다. 감정을 의심하니 나를 돌봐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느끼는 거야? 그렇게 느껴야 하는 상황이 맞는 거야? 하고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나는 자우림이 좋아. 소리 내어 말해본다. 이제 그만해야지, 이런 식의 자기 검열은. 좋으면 그냥 좋은 거다. 앞서 변명하지 않고 나를 변호하지 않고 그냥 좋아하기로 한다. 이렇게 그냥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일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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