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는 순간 변질되는 이야기-절창, 끊어진 노래

절창, 구병모, 문학동네 (2025)

by 클레어

구병모 작가는 핫하다. 단편 〈파쇄〉 하나만 읽었는데도 이 작가의 스타일이 보였다.


첫인상은 이랬다. 순수문학이 잘 건드리지 않는 대중적인 소재를 택한다. 서스펜스로 서사를 끌어간다. 인물은 입체적이고 냉소적이다. 언어는 섬세하고 난해해서 가독성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주제는 철학적이다.


《절창》은 2025년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 2위다. 〈파쇄〉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터라 망설였지만, 궁금한 마음에 사서 읽었다.


에필로그부터 역시, 구병모 작가다 싶었다.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한복을 차려입은 규방규수가 한 말이라 해도 믿어질 만한 문장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자신을 "화자"라고 규정한 인물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본격적인 서사 전에 "화자"와 "청자"라는 틀을 먼저 세우는 이유.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이다.


지금부터 내 말을 다 진실로 믿지는 말아라. 모든 이야기는 가공되는 순간 왜곡된다. 그러니 행간을 읽어라. 언어의 뼈와 살과 피, 그 질감과 무게를 살펴라.


마치 작가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 것 같은 소설이다.




작가들이 이 소설을 좋아한 이유는 알 것 같다. 작가란 결국 자기 이야기를 허구 속에 몰래 감추어두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숨기는 행위 자체를 전면으로 꺼내온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곧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임을 처음부터 선언한다. 속이 다 시원했을 것이다.


독자들은? 서사 자체가 마냥 재밌고 쫄깃하다. 길고 난해한 문장들을 기어이 읽어낼 정도로. 철학적인 분위기를 음미하다 보면 뭔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게 구병모 작가의 힘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작가가 독자를 대신해 모든 생각을 다 해주는 느낌. 그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툭 던진다. 독자가 스스로 고민할 틈을 주지 않는다. 화자는 묘하게 독자 위에서 군림한다. 때로는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시기를 통으로 생략하다니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자기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한 번쯤 돌아봤으면 합니다.


자극적인 서사를 기대하는 독자의 시선 자체가 폭력적임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이 고자세가 나는 불편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독자를 깔보며 쓴 글이라는 말은 아니다. 냉소의 칼날은 작가 자신에게도 향한다.


교육은 충분히 받고 필요한 일을 실행하는 능력은 있으나 대외적으로는 크게 별 볼 일 없는 사람, 가성비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람을 찾았던 거라면 말입니다.


화자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이 말은 차갑다 못해 뼈가 시리다. 나에게도 촌철살인 같아서 불에 덴 듯 뜨끔했다.



재미있고,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읽을 만한 책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도 한 가지 물음이 남았다. "절창(絶唱)"—끊어진 노래, 혹은 다시없을 노래. 냉소로 쌓아 올린 문장들 사이에서 말해지지 못한 것들의 무게를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안 그래도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는데, 소설마저 이렇게 서늘해야 하는지. 그 물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답을 찾고 있다. 그게 구병모라는 작가의 본래 체온인지, 아니면 이 소설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온도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이지 않을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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