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많이 가봐. 될 수 있으면 방학 때마다”
대학에 입학하는 어느 2월, 아직 찬바람이 세게 불던 때였다. 우리 학교는 MT를 가기 전 신입생과 선배들이 모여서 1주일 남짓 캠프를 했었다. 그 때 캠핑 장소는 스키장이었는데, 그 때 만난 강사 중 한명이 카페에서 해줬던 말이다. 우리 학교 출신도 아닌 그 강사와 몇 명의 신입생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이유로 카페에서 차를 마셨고,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짐작하건데 초면의 어색한 분위기에서 여러 화제들이 오갔겠지만, 내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말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여행을 많이 가라는 말. 그리고 그는 곧 쐐기를 박았다.
“학생이라 여유가 없겠지만, 집에서 만약 도와주실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잘 이용해. 죄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하고 느끼는 대학 생활을 하길 바라”
도대체 여행의 무엇이 그렇게도 좋기에,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초면인 학생에게 저런 확신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학 등록금이 걱정되어 국립대로만 학교를 지원했던 나는 비릿한 피해의식을 느낌과 동시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경험하고 싶은 막연한 동경을 느꼈다.
대학 생활은 나를 여행으로 이끈 또 다른 이유였다. 학과 공부는 맞지 않았고, 매 시간이 버티는 식이었다. 진로가 보장되는 안정성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내가 바라던 집단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학교생활에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대신 대학 생활 동안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여행을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볼수록, 일상과 여행이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독서와 음악을 통해 감정과 느낌, 생각들을 정리하고 타인과 공유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여행은 어딘가로 떠나야 했고, 그 곳에서는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적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에 온 집중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서 짚어보면 당시의 감정이나 생각, 느낌은 쉽게 휘발되어 버리곤 했다.
아쉬웠다. 분명히 여행 중 들었던 감정과 생각들이, 그곳의 풍경과 생활 속에서 느낀 일상들이 존재했는데. 다시 돌아와 지내다 보면 그 생생함은 사라지고 아득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여행 중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정리하고자 한다. 여행에서의 현재감이 영영 사라지지 않도록. ‘언어’라는 나의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유일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기억들이, 나만의 것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