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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May 12. 2022

프롤로그(2)

남미로 가는 길(2)

 버스는 3시간 남짓 달려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주말에 당일치기로 예술의 전당에 가거나, 방학 때 누나의 자취방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양손 가득 이불 짐과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을 나섰다. 상경의 기대보다 홀로 있을 엄마 걱정이 앞섰지만, 독립영화관 하나 없는 답답하고 좁은 고향을 뜨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렇게 난 서울에서 남미와 대척점인 전공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난 교대를 다녔다. 전공을 선택할 때는 나의 의지보다, 온 구성원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가풍과 당시의 가정형편이 크게 작용했다. 교대에 입학하면서도 ‘안정적인 궤도에 빨리 오른 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마음이 가장 컸다. 대학 수업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학기 중에는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과외, 카페 알바, 과사무실 근무, 단기 주차 알바 등등. 심지어 대학교 1, 2학년 때는 학교 축제에도 가지 않고 후문 앞 던킨도너츠에서 일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방학에는 무조건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MT에서 만난 한 스키강사의 권유로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여행이 얼마나 좋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저렇게 서슴없이 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였다. 도착지 없이 모은 돈으로 별달리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았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여행 짐을 꾸리고 있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중학교 동창들과 함께한 제주도 여행을 시작으로 동남아와 유럽, 그리고 미국을 다녀왔다. 즐거웠다. 힘들게 번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아이폰과 맥북, 카메라와 아이패드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차분히 가라앉은 새벽 공기를 휘감고 도착한 공항에서 낯선 지폐를 환전하고. 오랜 비행을 끝낸 뒤 여권에 가지각색의 도장을 찍고. 생경한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 잊지 못할 분짜와 팟타이를 먹고. 교과서에서만 보던 모나리자와 그랜드 캐니언 피사의 사탑 그리고 에펠탑을 보고.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며, 이곳이 천국인가 싶을 정도의 행복함을 느끼던 그 순간들을 통해 난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여행할수록 마음 한편에 석연찮음이 생겼다. 처음엔 제주도로 만족했지만 곧 해외로 가고 싶어 졌고, 베트남을 다녀온 후에는 유럽과 미국을 열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유럽과 미국까지 다녀오고 나니 뭔가 허탈했다. 빈 통장이 이유는 아닐 텐데. 그때 불현듯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남미로 가면 정말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본과 대만 여행을 끝으로 난 졸업반이 되었고, 임용고시가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1월부터 대학 동기들과 스터디를 시작했다. 임용은 겨울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나는, 총 1년이 걸리는 긴 레이스였다. 카페에서 과학 지도서 스터디를 하던 중, 스터디원 한 명이 고구마 라테를 내려놓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우리 진짜 운 없지 않냐. 중학교 때는 신종플루에, 고등학생 때는 수능이 갑자기 A, B형으로 나뉘질 않나 근데 갑자기 임용 티오까지 안 좋을 거라는 소문이 돌지”

 우린 진짜 말 그대로 운이 없었다. 내가 시험 보기 전까지 3~4년 동안 서울을 기준으로 초등교사를 매 해 900~1000명 정도 뽑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를 비롯한 광역시와 주요 지방들도 티오가 호황이었기에 교대 입학은 곧 임용고시 합격이었다. 어느정도였나면 11월에 시험 보는 임용 1차는, 추석부터 공부해도 합격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돌 때가 있었다.


 하지만 8월이 되어 서울 사전 티오가 105명으로 나오고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여름의 무더운 열기가 카디건을 입고 있어야 할 풀 냉방 스터디실의 두꺼운 유리를 넘어오지 못하고 눈물자국을 내는 날이었다. 오전에 교육청에서 사전 티오가 발표되자 스터디실 곳곳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이윽고 분위기는 영안실처럼 서늘해졌다. 모든 스터디실에서 동기들이 나와 가족과 친구에게 전화하고, 교육청 페이지를 계속 새로고침 하거나, 화를 내거나 흐느껴 울었다. 열심히 공부해도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불황이 앞으로 이제 시작일 것이라는 걱정이 엄습해왔다.

충격적이었던 서울의 사전 티오

 나는 나대로 억울했다. 난 교사가 된 후 안정적인 수입과, 시간적 여유를 갖춘 다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려고 힘든 타향살이를 4년간 해온 건데. 수능을 보고 난 후의 허무함과는 다르게, 억울했다. 아직 임용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던 전공으로 취업에 실패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텐데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다행히 본 티오는 사전 티오에 비해 올라서 385명을 뽑았다.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걱정되었다. 우리 학교 졸업생만 해도 400여 명 가까이 되는데, 이화여대와 교원대 지방 교대 그리고 재수생과 현직들의 응시까지 더해지면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다행히 티오가 늘어났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숫자였다

 1차 시험이 다가올수록 끝없이 많은 공부량과 불안감에 짓눌려,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덕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진 느낌. 어디가 도착지 인지도 모른 채, 육지나 섬이 나오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도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전속력으로 수영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게 등대가 되어준 유일한 것은 '황금 백수’였다. 황금 백수는 임용에 합격하고 발령을 받기 전까지 마음 편히 지내는 사람을 뜻했다. 실제로 임용고시에 합격한 선배들도 발령이 최소 1년 혹은 2년 후에 났었다.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그 기간을 동경했다. 시간강사나 기간제 혹은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돈을 벌고, 여행과 취미활동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인스타그램으로 보면서 정말 부러워했다. 그래서 동기들과 매일 도서관이 문 닫을 때 나오며 "우리도 꼭 황금 백수하자"를 다짐하며 나왔고,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 정말 다행히도 황금 백수가 되었다.

합격창을 봤을 때에는 기쁨보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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