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감독 :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
배우 : 니나 호스(Nina Hoss), 로날드 제르필드(Ronald Zehrfeld), 니나 쿤첸도르프(Nina Kunzendorf) 등
2014년, 독일 영화
제목 '피닉스'.
주인공 넬리가 자신의 남편 조니를 다시 찾게 된 클럽의 이름.
그러나 감독이 이 영화의 이름을 '피닉스(불사조)'로 지은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기나 주인공 넬리의 상황을 살펴보면 불사조의 특징과 닮아있다. 불사조가 죽음에서 부활하듯이,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재건되는 독일의 모습이나 죽음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넬리의 상황이 마치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새, 피닉스를 연상케 한다.
<줄거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넬리는 얼굴이 망가졌다. 친구 레네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 국경을 넘어 독일로 돌아온 넬리는 성형 수술을 하게 된다. 예전의 자신의 얼굴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막상 수술이 끝난 넬리의 얼굴은 달라져있다.
얼굴이 회복되자 넬리와 레네는 베를린의 한 아파트에서 거처하며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 등 유대인들의 도시로 떠나기 위한 비자 발급 절차를 밟는다. 레네는 넬리가 다른 유대인들이 사망하며 남긴 유산을 받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넬리는 베를린을 떠나는 걸 망설인다. 바로 자신의 남편, 조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비도덕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고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 조니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 컸다. 넬리는 조니를 찾고 싶어한다.
어느 날 밤, 넬리는 외출을 했다가 '피닉스'라는 클럽에 우연찮게 드르는데, 그곳에서 조니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조니의 이름을 부르지만 조니는 얼굴이 바뀐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넬리는 상심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피닉스'를 찾아간다. 조니는 넬리가 자꾸 '피닉스'를 찾아오자 직업을 구하는 사람인 줄만 알고 넬리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게 된다. (죽은 줄 아는) 자신의 아내를 닮았으니 그 역할을 대신 해주면 아내에게 돌아갈 몫의 유산을 타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넬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에게 섭섭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넬리는 남편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기만 하다.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반지하방으로 넬리를 데려간 조니는 아내의 필체, 걸음걸이, 패션, 화장등을 똑같이 따라해야한다면서 넬리를 연습시킨다. 자신을 눈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가 원망스럽지만 넬리는 천천히 '넬리되기' 연습을 하는 척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넬리는 옛날 '넬리'의 모습이 되어가지만 조니는 여전히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점차 조니를 향한 실망이 커져가는 와중에 넬리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남편 조니가 알고보니 자신을 독일 나치에 넘긴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넬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면서 조니가 자신을 배신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나치에 넘긴 뒤 곧바로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는 걸 알게 된 후, 남편의 배신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조니의 계획 마지막 날이 닥치고 기차 역에서 마중 나온 옛 친구들 앞에서 넬리는 '넬리'인척 연기를 한다. 화창한 날씨 아래 넬리의 귀환을 축하하는 오찬 중에도 조니는 여전히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넬리는 조니에게 'speak low'라는 노래의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조니는 그제서야 자신의 아내가 눈 앞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넬리는 노래를 마치고 자리를 떠난다.
<끝>
- 감상평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는 '피닉스'가 처음이었는데 이 감독의 다른 영화 '운디네'나 '트랜짓'도 기회가 되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미장센이 마음에 들었다. 음악의 쓰임, 이야기의 전개 속도, 장면의 적절한 배치, 절정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흐름 등등 만족스러운 점이 많았다.
초반부에는 이야기가 아주 천천히 흘러가기 때문에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얼굴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베를린의 아파트에서 머무는 부분이 체감상으로 좀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넬리가 남편 조니를 찾고 나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흥미롭게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넬리의 시점에서 영화가 전개되기 때문에 관객은 넬리의 입장에서 조니를 바라보게 된다. 조니는 처음부터 넬리를 '아내와 닮은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조니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말을 하거나 아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는다. 넬리가 자꾸만 이야기를 유도해도 조니는 완전히 아내를 잊은 사람처럼 말하기를 꺼려한다. 어쩌면 조니는 넬리를 나치에 신고했을 때부터 넬리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내가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오지 않아야 자신이 아내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넬리는 끊임없이 조니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갈구하면서 항상 기대에 찬 눈으로 조니를 바라본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돌아온 넬리는 더 이상 조니의 머릿 속에 존재하는 '유행하는 염색과 머리스타일을 하고 파리에서 산 신발을 신는 넬리'가 아니다. 넬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성이 말살되는 끔찍한 경험을 했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넬리는 황폐해지고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조니가 알아봐주었으면 한다. 조니가 원하는 '넬리'가 되는 과정에서 넬리는 끊임없이 조니에게 "실제로 아내가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온다면 화장하고 꾸민 모습이 아닐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조니는 "사람들이 한눈에 봤을 때 '넬리'여야 한다."면서 넬리의 말을 묵살한다. 이런 대목을 통해 현재의 조니에게 넬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저 '아내였던 여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니가 주장하는 '넬리'의 모습은 유동적이지 않고 과거에 고정된 정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넬리'하면 떠오르는 특징 몇가지 이외에 다른 모습은 '넬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넬리를 향한 조니의 마음이 얼마나 얄팍하고 무감한 것인지 관객은 깨닫게 된다.
반면, 조니를 향한 넬리의 마음은 너무 깊고 진실되어서 조니와 넬리 사이 감정의 비대칭이 확대되어 보여진다. 조니를 생각하며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왔다는 대사, 조니를 바라보는 넬리의 눈빛, 자꾸만 아내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말들. 이 모든 것들이 넬리를 너무 비참하게 보이게 한다. 또한, 관객은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못 알아볼 수 있지? 아무리 성형수술로 얼굴이 변했다고 하나 손 모양, 몸의 곡선, 말투나 목소리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을텐데 어떻게 저 정도로 아예 못알아볼 수가 있나? 자신의 아내를? 영화 자체는 극적이지 않고 비교적 잔잔하게 흐르지만 넬리의 입장에서 몰입해서 보는 관객은 끝을 향해 다다를 수록 점차 더 큰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넬리는 '넬리 되기' 과정에서 끊임없이 조니에게 자신을 알아볼 기회를 준다. 넬리는 성급히 '내가 바로 당신 아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필체를 쓰면서, 걸음걸이나 행동을 통해서 조니에게 힌트를 준다. 내가 당신의 아내 넬리이고, 내가 당신한테 돌아왔다고. 하지만 조니는 끝의 끝까지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넬리는 점차 조니에게 실망을 거듭하면서 남편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을 나치에 넘치고 배신을 하고 곧바로 이혼 수속을 밟아버리고 죽었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돈까지 타먹으려는 모습 등등. 넬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남편의 진실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침내 베를린 역에 도착해서 예정되어있던 연극을 벌이면서 넬리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다. 어떤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넬리는 표정이 없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편을 향한 넬리의 환상과 기대가 완전히 부서져 내린다. 넬리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예전 독일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오찬에서 넬리는 남편에게 예전에 그랬듯 피아노를 쳐달라고 한다. 자신은 노래를 부를테니까. 여전히 '넬리'가 넬리인줄 모르는 남편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피아노 반주를 하고, 넬리는 'speak low'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time is so old and love so brief
Love is pure gold and time a thief
we're late, darling we're late
The curtain descends, everything ends too soon, too soon
시간은 오래되고 사랑은 너무 짧네
사랑은 순수한 금, 시간은 도둑
늦었어, 내 사랑, 우리는 늦었어
커튼 막이 내려와, 모든 것이 빨리 끝나네, 빨리 끝나네
넬리의 노래를 들으며 조니는 그제야 자신의 아내가 바로 여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손이 멈추고 멍한 얼굴로 넬리를 보지만 등을 돌린 넬리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르고선 방을 빠져나간다. 'speak low'의 가사처럼 그들의 사랑은 되돌리기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나는데 참 넬리의 인내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올만큼 남편을 사랑했는데 그 끝이 배신이라는 사실도 참 씁쓸했다. 남편이 너무 현실적인 개새끼인데 비해 넬리의 사랑은 너무 깊어보여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작은 복수를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노래를 부르는 넬리의 마음이 처참하게 느껴져서 슬펐다.
총 평점 3.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