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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양 Dec 04. 2021

[영화] 홍등(Raise the Red Lantern)

#9

홍등


감독 : 장예모(Zhang Yimou)

배우 : 공리(Gong Li), 허새비(Saifei He), 마정무(Jingwu Ma) 등

1991년, 중국/홍콩/대만 영화


 '홍등(Dà Hóng Dēnglóng Gāogāo Guà)'은 쑤퉁의 원작 '처첩성군(Wives and Concubines)'을 각색한 영화다. 장예모 감독, 공리 주연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에 개봉했다. 제 4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1993년 BAFTA 외국어 영화상, 1992년 아카데미상 후보 등등의 쟁쟁한 수상경력이 있다. 

 1987년 '붉은 수수밭'에 출연하며 장예모 감독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공리는 이후 '홍등(1991년)', '귀주이야기(1992년)', '인생(1994년)', '황후화(2006년)', '5일의 마중(2014년)'등등 장예모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며 열연을 펼쳤다. 특히, '붉은 수수밭', '홍등' 그리고 '귀주이야기'는 빨간색의 강렬한 이미지를 이용해 억압된 여성상을 표현한 장예모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공리에게는 배우로서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 이번엔 영화 '홍등'에 대해 다뤄보려고 한다. 


<줄거리>

 1920년대 중국, 대학생 송련은 아버지가 작고한 뒤, 계모의 권유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가게 된다. 혼자 짐가방 하나 들고 진 대감의 집에 도착한 송련은 빨래를 하던 하녀 안아를 마주친다. 진씨 집안의 넷째 부인이 된 송련은 앞으로 지내게 될 처소의 마당에서 하인들이 커다란 홍등에 불을 켜서 올리는 장면을 바라본다. 송련을 치장해주고 발 안마를 해주는 노인 하나는 앞으로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 것이라는 말을 한다. 

진대감 집에 막 도착한 송련

 송련과 첫날 밤을 지낸 진 대감은 셋째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달려간다. 아침이 밝자 송련은 진씨 집안의 첫째 부인부터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에게 차례대로 인사하러 간다. 늙은 첫째 부인과 다정한 둘째 부인은 송련의 인사를 맞이하지만 가수였던 셋째 부인은 바쁘다는 핑계로 송련의 인사를 거절한다. 

 식사자리, 송련이 원하는 반찬이 올라온다. 진 대감과 밤을 보내면 원하는 반찬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생긴다. 다음 날 밤 역시 송련의 처소에 홍등이 켜진다. 하지만 집 지붕에 올라 새벽부터 노래를 불러대는 셋째 부인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깬 송련은 직접 지붕으로 가서 셋째 부인과 대면하게 되고,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셋째부인은 그 이후로도 계속 여러 핑계로 송련의 신경을 건드리며 진 대감을 자신의 처소로 부른다. 이 때문에 송련이 진대감에게 하소연하자 진대감은 어리광 부리지 말라며 화를 풀라는 식의 이야기만 한다. 송련의 짜증이 계속 되자 진대감은 더 이상 송련의 처소에 홍등을 올리지 않는다. 송련은 매일 받던 발 안마도 받지 못하고, 식사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반찬도 먹지 못한다. 

발 안마를 받는 송련

 송련은 심심한 나머지 진대감의 넓은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되고, 문이 굳게 잠긴 지붕 위의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부인과 담소를 나누다 그 방에 대해 물어보자 둘째 부인은 사람 여럿 죽어나간 방이니까 다시는 가지 말라고 충고해준다. 

 그러던 중, 셋째 부인에게서 마작을 하러 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송련은 불편해하면서도 마지못해 마작을 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셋째 부인이 집안 전담 의사인 고 의원과 정을 통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송련은 내심 충격 받지만 아무한테도 내색 않고 그 비밀을 숨겨준다. 

마작두는 송련과 셋째 부인

 하루는 송련이 진대감에게 잠긴 방에 대해 물어보지만 자세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처소에 홍등을 올리게 된 송련은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식사 하겠다고 고집 부린다. 진대감은 집안 도리라며 그럴 순 없다고 하지만 송련은 고집을 꺾지 않고 결국 방에서 식사하게 된다.

 어느 날, 피리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서 집에 돌아와 있는 첫째부인의 아들이자 진씨 집안의 장남 비포를 만난 송련은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이후, 송련은 피리를 찾다가 하녀 안아의 방까지 뒤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안아가 훔친 홍등 여러 개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저주인형을 보게 된다. 송련은 안아를 마구 때리면서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실토하라고 윽박지른다. 안아는 둘째 부인이 그랬다고 인정하고, 송련은 언제나 친절한 둘째 부인의 얼굴 뒤에 다른 음모가 있다는 사실에 강한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다. 

'송련'이 적힌 저주인형

 알고보니 송련의 피리는 진대감이 남자에게서 선물 받은 것인줄 알고 몰래 가져갔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송련이 언짢은 얼굴을 하자 이에 질린 진대감은 둘째 부인 탁운의 처소에 홍등을 올린다. 진대감을 오랜만에 모셔 기분이 좋은 둘째 부인은 송련을 찾아와 젊어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싶은데 송련의 솜씨가 좋으니 자기 머리를 만져달라고 부탁한다. 송련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척 하면서 둘째 부인의 귀를 잘라버린다. 

귀 잘린 둘째 부인

 이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일지만 둘째 부인은 여전히 너그러운 사람인 척 가면을 쓰고 오히려 송련을 두둔해준다. 한편, 셋째 부인은 송련에게 찾아와 둘째 부인의 실체를 말해주며 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몇년 전, 셋째부인이 임신 3개월이었을 때 둘째 부인이 사람을 매수해 음식에 낙태약을 넣은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같이 임신을 하자, 본인이 먼저 아이를 낳고 싶어 분만 촉진제를 사서 맞고, 산파도 전부 데려가는 등의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셋째부인은 둘째부인을 조심해야한다며 송련에게 경고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송련은 다시 자신의 처소에 홍등을 켜기 위해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진대감은 송련의 임신을 축하하며 장명등을 올리라고 명한다.  

 송련의 하녀 안아는 피가 비친 내의를 보고 송련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곧바로 둘째 부인에게 달려가 이른다. 둘째 부인은 의사를 불러 송련을 진찰해야 하지 않겠냐며 우회적으로 제안하고 진대감은 집안 어의인 고 의원을 부른다. 결국 송련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진대감은 역정을 낸다. 송련은 안아가 홍등을 훔쳤던 일을 끄집어 내며 집안의 법도에 따라 벌을 받게 한다. 안아는 추운 겨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얼어 죽게 되고, 이후 둘째 부인의 처소에 홍등이 켜진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스무번째 생일을 맞은 송련은 술주정을 거하게 피우며 아무 소리나 떠들어대다가 둘째 부인 앞에서 셋째 부인이 고의원과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리게 된다. 둘째 부인은 다음 날 새벽 하인들을 시켜 셋째 부인을 끌어내고, 술에서 깨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송련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닫는다. 

끌려나가는 셋째 부인을 바라보는 송련

 셋째 부인을 끌고가는 하인들의 뒤를 밟던 송련은 그들이 자물쇠로 잠긴 지붕 위의 방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짐작한다. 일처리를 마친 하인들이 자리를 뜨자 그 방으로 다가간 송련은 죽은 셋째부인의 시체를 본다. 살인이 났다며 소리를 지르던 송련은 집안 사람들 모르게 셋째부인의 처소의 홍등을 전부 켜버린다. 사람들은 죽은 셋째부인이 귀신이 되어 되갚음을 하기 위해 홍등을 켠 줄 알고 혼비백산하며 놀란다. 이후, 송련은 완전히 미쳐버리고 셋째 부인의 처소 마당을 계속 떠돌아다닌다. 그 다음 여름, 진대감 집에는 다섯째 부인이 새로 들어오게 된다. 

<끝>



<감상평>


- 중국 영화의 역사


 장예모 감독은 중국의 '제5세대' 감독이다. 중국 영화의 발전 역사는 각 세대별로 구분되는데 현재 제6세대까지 발전해왔다. 대충 각 세대마다 특징을 살펴보면 제1세대는 흑백 및 무성영화가 주를 이루던 시기고, 제2세대는 항일 시기와 겹쳐 반외세/반봉건 등 개화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많았다. 제3세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사회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선전으로 영화가 쓰였던 시기다. 제4세대는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다시 문화적 자유를 찾은 감독들이 쉬운 이야기 구조를 통해 서민의 일상이나 인간 보편적인 삶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제4세대까지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제5세대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제5세대는 1982년부터 시작해 1989년 톈안먼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의 시기를 가르키는데 이때 활동했던 감독 중에는 장예모, 첸카이거, 티엔 주앙주앙 등등이 있다. 이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에 태어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중국의 농촌이나 군대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방 체험을 경험한 세대다. 또한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1987년 다시 개방된 북경영화학교에 입학해 영화예술을 배우고 졸업한 사람들이다. 제5세대 감독은 중국영화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해도 무방한데 이 세대 이전의 중국영화와 달리 서구적인 내러티브와 붉은색과 같은 강하고 화려한 색채, 상징성 등을 이용해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이념이 가진 허상, 몰락하는 봉건사회, 그 속에서 인민과 인간이 겪는 고통, 새로운 사회 변혁의 필요성 등의 주제를 강조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렇듯 제5세대 영화들이 중국 현대사 속의 잘못된 사회구조, 관습과 문화를 비판하다보니 의도를 했든 아니든 중국 공산당의 방향성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장예모 감독의 '홍등' 역시 당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공산당의 검열로 인해 개봉 후 중국에서 3년 간 상영금지 되었다. 그러나 제5세대 영화는 비록 자국인 중국에서 외면받았을지 몰라도 해외 영화제나 세계적인 영화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중국 영화의 위상을 한껏 높이기도 했다. 사실 제1세대~제6세대로 나누는 중국 영화사의 구분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제5세대 감독들이 중국 영화사에서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며 좋은 영화를 많이 남겼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의 배경이 된 건축 공간, 교가대원


 영화 '홍등'에서 진 대감의 집으로 등장하는 건물은 세트가 아니라 실제 중국 산시 성 핑야오 현의 교가대원(乔家大院, qiáo jiā dà yuàn)에서 촬영된 것이다. 교가대원은 지역 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이 주로 부르는 이름이고 공식적인 명칭은 좌중당(在中堂, zài zhōng táng)이라고 따로 존재한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지어진 건축물이며 만리장성 너머로 차나 두부를 팔던 교귀발(乔贵发)이 돈을 축적해 부자가 된 뒤 고향에 돌아와서 지은 집으로 현재 크기가 될때까지 두 번 정도 증축이 이루어졌다. 약 9,000의 부지에 총 313개의 방이 있으며, 청나라 시대의 전형적인 북부민가 양식을 따르고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 교씨 집안의 유명 상인이었던 '교치용(乔致庸)'의 일대기를 그린 '교가대원(2006년)'이라는 이름의 중국 드라마도 있다.  


실제 교가대원의 사진과 영화 속 장면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왼 : 실제 / 오 : 영화 속 장면
왼 : 실제 / 오 : 영화 속 장면


- '홍등'의 의미


 '홍등'은 시작 + 여름/가을/겨울/다시 여름으로 이루어진 총 다섯 개의 막을 가진다. 그 중 1분 10여초간 클로즈업 숏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공리의 연기와 분위기로 몰입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동시에 앞으로 관객이 따라가야 할 주인공 송련의 처지가 한 번에 이해된다. 


 송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빨리 치워 돈이나 얻으려는 계모의 강권으로 하는 수 없이 부잣집으로 팔려가듯 시집가게 된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만큼 이 당시 혼사는 본인의 결정권 없이 부모의 의견을 따라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신의 삶에 순응하는 송련의 암담하고 억눌린 심정은 표정 없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로 드러난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

- 어머니, 벌써 사흘째예요.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저도 다 알아들었어요. 시집가면 되잖아요.

- 잘 생각했다. 원하는 신랑감은 있고?

- 제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할 순 있나요? 늘 돈타령하시니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갈게요.

- 부자와 혼인하려면 첩 자리밖에 없어.

- 첩 자리뿐이면 첩이 되면 되겠네요. 여인의 운명이 다 그렇잖아요.


 집을 떠난 송련은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와 진 대감의 집까지 직접 걸어간다. 진대감이 새 신부를 맞이하며 보낸 붉은 가마를 타지 않고 제 발로 꿋꿋이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송련의 마음 한 구석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처럼 느껴진다. 원하는 신랑감이나 정실부인의 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집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직접 본인이 함으로써 그 혼사가 강요당한, 혹은 팔려나간 결혼이 아닌 스스로가 결정한 결혼이라는 사실이라고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 대감의 집에 도착한 송련은 빨래하고 있는 하녀 안아를 만난다. 안아는 진대감의 부인도 첩도 아니지만 가끔 진 대감의 시중을 들며 남몰래 이 집안의 마님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진씨 집안의 넷째 부인으로 들어온 송련에게 처음부터 적대감을 드러내며 극 내내 송련과 미묘한 갈등을 빚어낸다. 송련은 매일같이 자신의 처소에 켜지는 커다란 홍등, 발 안마 의식, 식사 자리의 반찬 선택 등을 통해 진씨 가문에 존재하는 일련의 계급과 힘의 규칙을 점차 이해한다.


홍등이 켜진 마당


 한편, 영화 내내 진 대감의 얼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 실루엣으로 처리되거나 목소리로만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한 장면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나 그마저도 멀리서 카메라를 잡기 때문에 제대로 된 모습이 나온다고 할 수 없다. 클로즈업 샷 하나 나오지 않지만 진 대감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여자들이 서로 다퉈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매일 부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의 처소 앞으로 나와 밤을 보내기로 한 부인이 누구인지에 관한 진 대감의 결정을 보아야 한다. 집사는 커다란 홍등을 들고 밤을 보내기로 결정된 부인의 처소 앞에 멈춰서는데 그러면 처소 앞에서 기다리던 부인들은 누가 그 날 처소에 홍등을 올리고, 발 안마를 받고, 다음 날 식사 자리 반찬을 결정할 권한이 생기는지 알게 된다.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결국 부인들의 삶이 진 대감을 기준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여인이 누가 됐든 홍등을 올려야만 여성으로서 이 집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련은 셋째 부인이 고 의원과 몰래 정을 통한 일과 안아가 홍등을 훔쳐 자신의 방에 숨겨둔 일을 알면서도 묵인해준다. 자신과 셋째 부인, 그리고 마님이 되겠다는 망상을 꿈꾸는 안아의 처지가 별반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송련은 자신의 역할이 단지 지아비를 돌보고 아이를 낳는 것 이외의 다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고, 그 사실에 해탈하고 수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 대감의 눈에 들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나름대로 이 집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둘째 부인과도 친하게 지내고 첫날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셋째 부인과의 마작 초대에 응한 것이다. 


벌을 받는 안아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더 이상 송련을 버티게 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바로 둘째 부인의 배신과 안아의 죽음, 그리고 셋째 부인의 죽음이다. 둘째 부인은 극 중에서 부처의 얼굴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온화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송련을 대한다. 반면, 셋째 부인은 처음부터 송련에게 쏟아진 진 대감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꼼수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단순히 둘째 부인은 좋은 사람이고 셋째 부인이 이 집안의 악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안아의 방에서 발견된 저주 인형을 통해 둘째 부인이 진정한 숨은 악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야기의 흐름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초중반부까지만 해도 홍등을 올리고 발안마를 받는 일에 큰 흥미나 집착을 가지지 않던 송련이 갑자기 임신을 했다며 거짓말을 한다. 둘째 부인의 배신으로 진씨 가문에서 자신의 지위가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이유도 있지만 '홍등', '발 안마', 그리고 '반찬 선택'이라는 권력의 상징을 부여받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송련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둘째 부인의 실체가 점점 가시화되면서 송련은 완전한 절망과 체념의 상태로 들어간다. 


 눈이 내린 한겨울 망루에 올라 셋째 부인과의 대화를 나누는 송련은 자신이 이 집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살아갈 의지를 잃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그동안 진 대감의 애정을 끌어보려 노력하던 셋째 부인의 진심 역시 드러나며 결국 그들의 삶이 가질 수 없는 허상을 잡기 위한 일종의 헛된 게임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을 알 수 있다. 


송련과 셋째 부인의 대화

- 이 새벽에 여기서 뭐 해?

- 형님 노래를 듣고 있었죠. 정말 듣기 좋네요.

- 뭐가 좋다고 그래. 연극일 뿐인데. 연기를 잘하면 남을 속일 수 있지만 엉망이면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게 돼. 자신도 속일 수 없을 땐 속일 건 귀신 뿐이야. 

- 사람과 귀신은 숨 한 모금 차이일 뿐 사람이 귀신이고 귀신이 사람이죠. 

- 동생, 내 말 서운해하지 마. 안아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 등을 훔쳐서 달면 좀 어때? 마님이 되는 꿈을 꿨을 뿐이잖아. 

- 안아를 이용한 사람에게 경고하려고 그랬어요. 

- 하긴, 고작 하녀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 누가 뒤에서 부추긴거지. 탁운(둘째 부인)이 어제 등을 밝힐 때 우쭐거리던 거 봤잖아. 자기 세상 같나 본데 조만간 혼쭐을 낼 거야. 

- 등을 켜든, 끄든, 봉인하든 전 다 상관없어요. 그저 이 집에서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어요. 고양이나 개, 쥐같기도 한데 확실히 인간 같진 않아요. 여기 서서 늘 생각했는데 지붕 위의 방에서 목매는 게 낫겠어요. 

- 함부로 죽는다는 말 하지 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지금 상황도 아주 나쁘진 않아. 내가 맨날 웃음을 흘리는 건 사실 즐거워지는 노력이야. 

- 형님은 당연히 즐겁겠죠. 고 의원을 만나면 되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지붕 위의 방에서 목매는 게 낫'다는 송련의 말과 달리 진짜로 지붕 위의 방에서 목매달려 죽는 사람은 셋째 부인이 되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다름아닌 송련이라는 사실이 또 하나의 비극처럼 보여진다. 스무번째 생일을 맞아 희망을 잃고 술을 마신 송련이 한껏 취해 둘째 부인 앞에서 셋째 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사실을 불어버리는 장면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는 처절한 발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하고 비열한 둘째 부인은 송련의 고백을 기회삼아 한치의 동정심도 없이 셋째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어버린다. 


 송련은 그나마 마음을 나누었던 셋째 부인의 죽음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지붕 위의 방의 비밀을 마침내 깨닫고 나서 정신을 놓아버린다. 그 다음 여름 진 대감의 집으로 젋고 어린 새 신부가 다섯째 부인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미 진씨 집안에서 일어난 비극을 지켜본 관객은 송련이나 셋째 부인의 삶처럼 그 여인의 삶 역시 하나의 비극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여인들이 지닌 운명이 비슷한 모양의 굴레를 띄고 있음을 알게 된다. 

 

- 곳곳에 드러나는 색깔의 배치


 빨간색이 전체적인 테마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눈에 띄는 몇가지 색깔들이 있다. 먼저, 진 대감의 저택의 벽과 바닥은 어둡고 가라앉은 회색인데 이는 삭막하고 메마른 집안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회색으로 점철된 커다랗고 네모나게 정형화된 공간은 엄격한 규칙과 질서가 존재하는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시대를 대변하며, 전반적으로 어둑한 배경 때문에 그 위로 밝혀지는 붉은 색깔의 등은 흔히 중국에서 생각되는 축복과 즐거움의 의미보다는 쓸쓸한 저주가 내린 느낌을 준다. 


 또한, 중국 사람들이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이 영화에서 쓰인 빨간색은 약간 사창가의 홍등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봉건 시대에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첩문화는 어찌보면 사창가와 닮아있다. 첩은 정실부인이 가지는 정식 지위에서 벗어나 기쁨과 쾌락을 기반으로 남자 후계자를 보기 위해 일부러 사오거나 얻게 되는 '소유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성을 구매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창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영화 '홍등'에서 부인들의 처소에 켜지는 붉은 등은 사창가의 홍등을 연상시키며 결국 진씨 가문의 '홍등'이 켜진 후 일어날 행위는 사창가에서 일어나는 행위와 똑같다. 단지 내 해석이긴 하지만 영화 속 '홍등을 올리는' 의식에 이런 상징이 없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장예모 감독은 홍등을 키고 끄는 모습을 하나의 길고 집요한 장면으로 구성해 사창가의 저급함보다 조금 더 고상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홍등


 그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색깔은 흰색이다. 송련이 진대감의 집에 처음 들어오면서 입은 옷, 셋째 부인과 첫 대면을 할 때 입은 옷,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내리는 눈까지 전부 흰색이다. 이 흰색 역시 의미가 있다.  


 송련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진대감의 집으로 들어올 때 입고 있는 흰 옷은 아직 순백의 영혼을 지닌 송련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고, 셋째 부인과의 껄끄럽지 않은 첫만남에서 송련이 입고 있는 흰 옷 역시 송련이 가지고 있는, 아직은 날것인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진씨 가문에 물드는 사람처럼 송련은 여러 색깔과 패턴이 그려진 옷으로 바꿔 입게 된다. 진씨 가문의 장남 비포를 만났을 때는 애정의 상징인 붉은색 옷을, 둘째 부인의 귀를 자를 때는 암흑같은 검은색 옷을,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이야기 할 때는 욕망을 닮은 노란색 옷을, 셋째 부인이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송련의 옷은 거무죽죽한 보라색의 옷이다. 


 앞에서 송련이 입은 흰색 옷이 하나의 순수하고 무지한 상태를 뜻한다면 후반부에 등장한 흰색은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셋째 부인이 끌려가 지붕 위의 방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순백색의 눈은 클라이맥스 장면 속에서 일어나는 음모의 어두운 이면과 크게 대비되어 그 의미를 더 부각시켜준다. 또한, 눈이 발자국과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덮듯이 지붕 위의 방에서 일어나는 진씨 가문의 비밀은 결국 흰색의 침묵 속으로 잠겨들고 이는 송련의 삶의 의미가 무용한 백색의 상태가 되어버림을 뜻한다. 


눈으로 덮인 지붕 위


- 마치며


'홍등'은 유교와 봉건시대가 만들어낸 가부장제 계급 사회에서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던 여성들의 지위와 그들의 삶을 자세히 조명하고, 부인과 첩으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도구적이며 헛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는지 우아하게 드러내었다. 나에게 만약 이 주제를 던져주며 영화를 제작하라고 했으면 이처럼 절제되고 아름답게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장예모 감독이 왜 중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시대의 거장인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영화였다. 영화 자체로는 너무 좋지만 내용이 씁쓸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총 평점 4.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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