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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었다.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순위에도 든만큼 화제작 아니겠는가. 올해가 가기 전 후딱 읽자는 마음으로 소설을 집어들었다.
<줄거리>
주인공 지연은 남편과 이혼한 뒤 직업 때문에 희령으로 이사를 간다. 엄마의 고향이자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그러나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지연 역시 할머니와는 소원하다. 어느 날, 지연은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점차 친해지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 해준다.
고조할머니는 백정과 결혼했다. 당시 백정은 인간 취급을 못받던 직업이었기 때문에 백정의 자식인 증조할머니 삼천의 인생도 천대로 가득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무렵 삼천은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장터에서 처음 만난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개성으로 시집간다. 삼천은 고향을 떠나기 싫었지만 아프신 자신의 어머니를 돌봐주겠다는 새비 아저씨의 도움으로 떠날 수 있었다. 삼천은 결혼 후, 딸 영옥을 낳았다.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증조할아버지는 영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삼천은 자신의 딸을 아낀다.
이후, 고조할머니(삼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새비 아저씨도 새비 아주머니와 함께 개성으로 내려온다. 새비 아주머니는 백정의 딸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삼천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따스한 사람이었다. 삼천은 새비 아주머니를 소중히 여겼고, 새비 아주머니도 삼천을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새비네 가족과 개성에서 즐겁게 지내던 어느 날, 새비 아저씨는 임신한 새비 아주머니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몇년 뒤, 히로시마 폭탄이 터지고, 새비 아주머니는 새비 아저씨가 히로시마에 있다고 편지를 써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죽은 줄 안다. 그러나 새비 아저씨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느라 폐와 건강이 망가진 채 다시 돌아온다. 결국 새비 아저씨는 요양을 위해 고향인 새비로 떠나야 했고 이는 영옥의 인생에서 첫 이별이 되었다.
새비 아저씨가 고향에서 죽은 뒤, 새비 아주머니는 자신의 오빠가 사상범이라는 명목으로 잡혀가게 되자 군인들을 피해 딸 희자와 함께 고향에서 떠나 개성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사상'이라는 말을 탐탁치 않아했으므로 새비 아주머니는 개성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삼천은 이 일을 두고 새비 아주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만 이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영옥의 인생에서의 두번째 이별이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사람들은 우후죽신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영옥의 가족도 피난을 떠난다. 마침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새비네가 머물고 있는 대구의 고모할머니 댁이었다. 고모할머니 명숙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지만 손솜씨가 좋아 사람들의 옷을 수선해주거나 만들어주는 일로 돈을 벌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입대 지원을 하러 떠났고, 영옥, 삼천, 새비 아주머니, 희자, 명숙 고모할머니 이렇게 다섯 명은 대구에 남아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증조할아버지는 가족을 찾아 희령으로 떠나야 한다며 이별을 종용한다. 그리하여 영옥은 세번째 이별을 맞이한다.
희령에서의 삶은 즐겁지 않았다. 영옥은 즐거운 추억이 있는 대구를 그리워한다. 그러다 영옥은 종종 자신의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 하나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중혼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영옥은 남자와 헤어진 뒤 자신의 딸 미선과 둘이서 생활을 꾸려나간다. 혼자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해야했던 영옥은 바쁜데다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으로 점차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희자와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이 줄어든다. 그러던 중, 새비 아주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린 시절의 친구 희자와는 더더욱 연락이 끊긴다.
지연은 몇 달에 걸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 엄마, 언니와 함께 희령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 자신과 엄마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된다. 희령에서 지낸지 1년이 지나 지연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게 되고 이 곳을 떠나게 된다. 지연은 할머니와 계속 교류하며 예전에 연락이 끊겼던 희자와 할머니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끝>
<감상평>
최은영 작가의 이전 소설들-'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도 전부 읽었는데 이번 소설 '밝은 밤'만큼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편 소설은 대체로 짧아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백히 잡히지 않았다. 반면, '밝은 밤'에서는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 이렇게 5대가 이어지는 긴 서사를 통해 이야기에 집중하고 빠져들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인지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느꼈을 마음들이 잘 느껴졌고 소설이 가진 내용의 깊이도 훨씬 깊어진 기분이었다.
'밝은 밤'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사를 통과하는 긴 시기를 다룬다. 그 역사 속에서 연결되고 교차되어 살아온 5대의 이야기는 언뜻 소설 속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농부셨던 증조부모님이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조부모님이 있고, 베트남 전쟁을 겪었던 고모부가 있고, 민주화 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때 대학을 다니던 부모님이 있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 나의 가족과 친척들 생각이 많이 났다. 종종 추석이나 설날에 모여앉으면 가끔 들을 수 있는 "어른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종종 떠올랐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이 정답게 느껴졌고 책도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의 현대사에는 국가적인 슬픔이 많아서 인물 개인사에도 그런 슬픔들이 어쩔 수 없이 녹아든다. 일본에 일을 하러 떠난 새비아저씨는 조선이 일제에 강제로 지배되지 않았더라면 임신한 아내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타국으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념의 문제로 한국이 북한과 남한으로 갈라지지 않았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개성의 증조부모네에서 쫓겨나듯이 떠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영옥은 대구의 명숙 고모할머니와의 추억도 없었을 것이고, 헤어진 가족을 찾아 희령으로 떠나느라 다시 이별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은 항상 개인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그로 생겨난 필연적인 결과는 모두 개인이 담당해야할 문제가 된다. 시대라는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인물들은 주어진 한계를 수용하고 극복하며 살아간다. 이런 인물들의 삶에는 애환과 비극이 녹아들어 있고 그렇기에 '밝은 밤'은 참 슬픈 소설이 아닐 수가 없다.
비록 슬픔과 상실의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희망찬 점은 이 소설이 슬픔으로 끝맺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지연은 이혼을 했으며 이로 인해 계속해서 엄마인 미선과 갈등관계를 빚어낸다. 미선의 세대에서는 남자가 바람을 피우더라도 참고 살아야지 이혼이라는 커다란 흠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선은 자신의 딸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결혼'이라는 평범성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기를 원했다. 반면, 이혼이라는 상황 자체도 큰 사건인데 엄마마저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으니 지연은 크게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지연의 상처는 희령에서 할머니 영옥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부터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다. 영옥은 자신의 딸인 미선과는 대면대면하지만 손녀인 지연과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간다. 영옥은 지연을 섣불리 위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뿐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지연은 고조할머니부터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본인 가족의 역사와 시대가 남기고 간 상처를 보면서 할머니와 엄마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의 끝에서 지연은 이혼을 통해 얻었던 상처와 그런 결말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행동 패턴, 그리고 반복되는 엄마와의 갈등을 전부 명확히 직시하며 스스로를 치유해나간다. 또한, 중후반부에 등장한 개 귀리의 죽음도 지연이 인생을 이해하고 상실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결말에서 지연이 더 단단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지연과 영옥은 계속 조손관계를 잘 유지해나갈 것이며 오래 전 헤어졌던 희자와 영옥이 다시 만난다는 희망도 있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덮고 나자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다음 깨끗하게 갠 맑은 하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는 메세지처럼 보여서 개인적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 이 소설에서 여성들의 연대도 빼놓을 수 없다. 새비 아주머니와 증조할머니 삼천, 할머니 영옥과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 사이의 우정은 상반되지만 비슷한 결을 가진다.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살았을 삼천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보면 아마 많이 외롭고 억울했을 것 같다. 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출신으로 재단당하는 일들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삼천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새비 아주머니는 과연 삼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살면서 나를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지금도 쉽지 않은데 저 때는 (신분차이나 편견이 더 강하던 시대니까)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한번 상상해본다.
영옥과 희자의 우정은 좀 더 현실적이고 마음이 아프다. 어릴 때 그 누구보다 친하게 붙어지내던 단짝 친구같은 두 사람은 어른이 되고 환경이 달라지면서 멀어지게 된다. 영옥은 이른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하고 희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들어간다. 영옥은 자신의 삶을 자조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희자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주 주고받던 편지도 점차 하지 않고 상처받을까봐 서로의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멀어진 인연은 영옥과 희자가 할머니가 될때까지 이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환경의 변화로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과 멀어지는 일은 종종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공유하던 소중한 사람이 한순간에 타인이 되듯 뒤바뀌어버리는 것은 일종의 서글픈 상실이다. 끝에 지연의 도움으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은영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의 제목을 '밝은 밤'이라고 붙인 이유를 밝혔다. '밤'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 붙였고, '밝은'은 사람들이 쉽게 힘들다고 재단해버리는 그런 힘겨운 삶을 긍정적으로 기억해주고 싶어서라고. 밤은 절대 밝을 수 없다. 하지만 어두운 밤을 밝다고 말하는 모순이 왠지 이 소설과 우리네 삶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좋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