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감독 : 제인 캠피언(Jane Campion)
배우 :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 제시 플레먼스(Jesse Plemons), 코디 스밋-맥피(Kodi Smit-Mcphee) 등
2021년, 영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영화, 126분
원래 농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카우보이, 서부극 이런 류의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넷플릭스 상단에 뜨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흥미가 일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얼굴이 익숙해서 재미가 없더라도 시도는 해볼 가치는 있겠지 싶었다. 물론 초반부가 지루하기는 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가 있는데다 작품성도 있어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파워 오브 도그'는 1967년 출간된 토머스 새비지(Thomas Savage)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제목을 직역하면 '개의 세력' 정도. 시편 22:20의 구절 속 단어를 차용한 제목이라 굳이 한글 번역 안하고 영문 발음 그대로 제목을 들여온 게 최선이었던 것 같다.
제 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과 뉴욕/시카고/LA 비평가협회 등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전적이 있으며, 골든글로브 노미니된 상태다.
<줄거리>
1925년 몬태나의 필과 조지 버뱅크 형제는 엄청나게 큰 목장을 소유하고 있다. 부유한 목장주인 이들은 종종 황량한 벌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레드밀' 레스토랑에 들러 밥을 먹는다. '레드밀'은 미망인인 로즈가 아들 피터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필은 '레드밀'에서 피터를 보고 조롱을 하게 되고, 이에 상처받은 로즈를 달래주던 조지는 결국 로즈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필은 로즈가 자신 형제들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결혼 후, 필의 계속되는 눈치와 조지의 지속적인 무심함 때문에 로즈는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방학이 되어 의과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온 피터는 엄마가 술 중독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피터는 우연히 필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노려 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필은 피터에게 조금씩 호감을 보이며 소가죽을 엮은 밧줄을 직접 만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는 한 인디언 상인에게 필의 소가죽을 전부 넘겨버리는 일이 생기고 필은 화를 내면서 로즈를 탓한다. 피터는 자신이 짐승의 생가죽을 가지고 있다며 그걸로 밧줄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필을 달랜다. 필은 피터가 가져온 가죽으로 밧줄을 완성하지만, 탄저병에 걸려 결국 사망하고 만다. 필의 장례식 후, 피터는 창문 아래로 로즈와 조지가 행복해보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끝>
<감상평>
'파워 오브 도그'는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그 중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은 필 버뱅크와 로즈, 그리고 로즈의 아들 피터 간의 관계가 영화 내 심리전의 주축을 이룬다.
- 인물 해석: 필 버뱅크
먼저, 필 버뱅크는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마초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다. 특히, 극 초반 '레드밀'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피터를 발견한 필의 행동에서 이런 모습들이 가장 잘 드러난다. 피터는 깡 마른데다 흰 셔츠와 검은 바지, 검은 구두를 입고 샌님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필은 피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진다. 처음에는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집요하게 관찰하는가 하면 필이 팔에 걸친 행주를 두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보게들, 행주는 저렇게 두르고 다니는거야."라고 조롱하거나 피터의 말투를 따라하면서 피터가 웃음거리가 되게 한다. 또한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비하하듯이 촛불을 붙여 담배불로 쓰기도 한다.
또 하나 필의 특징은 잘 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초반부터 드러나는데 조지가 욕조에 앉아 "집에서 목욕해봤어, 형?"하고 묻는 질문에서부터 그가 모종의 이유로 잘 씻지 않음을 알수 있다. 영화 중반부에 부모님과 주지사 부부를 초대한 조지가 제발 만찬에 씻고 나타나라고 말하지만 필은 "그들에게 사실을 말해드려. 난 냄새나고 그걸 좋아한다고."라며 씻는 행위에 대한 완고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는 일종의 정제됨, 부의 지위, 상류층에 대한 거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회원일 정도로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나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경멸하는 듯하며 필이 대부분의 시간동안 입고 있는 옷은 카우보이 모자와 가죽바지(chaps)가 전부이다.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미국의 유서깊은 대학 우등 졸업생 모임.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대통령도 여기 속하였음
하지만 그렇다고 필이 아예 안 씻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연 속 공간에서 홀로 나체가 된 채 연못에 들어가기도 하고 온몸에 진흙을 펴바르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옷을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필은 자유로워보이기도 하고 평소같은 마초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겉으로 행세하던 가면을 벗어버린 사람처럼 필은 물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만져보기도 하고 과거 친밀하게 지냈던 브롱코 헨리(BH)의 이니셜이 적힌 천을 몸 위에 드리우며 수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브롱코 헨리'는 극 중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브롱코 헨리의 존재는 거의 대부분 필의 입을 통해서 언급되며, 필은 브롱코 헨리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끊임없이 복기한다. 브롱코 헨리가 엘크의 간을 따는 법을 가르쳐줬고, 브롱코 헨리가 폐마를 타고 멋지게 날아올랐고, 브롱코 헨리가 산맥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해주었고 등등. 그리고 필은 브롱코 헨리가 죽은 뒤에도 그가 타던 안장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가끔씩은 어루어만지기도 한다. 또, 필이 자주 가는 숲 속의 숨겨진 공간에는 겉표지에 브롱코 헨리의 이름이 적힌, 남성의 나체가 그려진 교본이 있다. 영화 속에서 브롱코 헨리와 필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 필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상대인데다 관객에게만 보여주는 숲 속의 필 모습을 통해 그가 동성애자이며 브롱코 헨리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준다.
- 인물 해석 : 조지 버뱅크
조지는 필과 형제지만 반대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같은 필과 달리 조지는 뚱뚱한 체형에 필처럼 날카로운 성격이거나 완전 마초도 아니며 오히려 무감하고 순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지는 카우보이처럼 입지않고 항상 정장을 입는다. 말을 탈 때도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어 필이 속이 좋지 않냐고 묻는 장면도 있다. 또한 잘 씻지 않는 필과 달리 조지는 깔끔한 외양을 유지하며 신사처럼 굴려고 노력한다. '레드 밀'에서 조롱당한 피터때문에 상처받은 로즈를 달래주기도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회적인 교류를 하려고 나서는 것도 조지다. 또, 조지는 로즈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잘 치지는 못함)에 만족스러워하며 커다란 고급 피아노를 사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는 어딘가 멍하고 무심한데가 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장 사업도 형인 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로즈가 피아노를 치기 꺼려하는데도 만찬에서 연주하라고 계속 말을 꺼내기도 하고, 필이 탄저병으로 죽었다는 의사의 말에도 "하지만 형은 동물 사체를 절대로 안 만졌는데요."라는 작은 의문을 표할 뿐 더 깊이 사건을 파고들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에 죽은 동물 시체를 보며 필이 "소가 죽어 있어. 가까이 못가게해. 탄저병이야."하는 장면이 있다. 형을 잘 아는 동생이라면 충분히 의심을 해볼만한 사인인데 조지는 그렇게 필의 죽음을 마무리 짓는다.
*탄저병: 탄저균으로 인하여 내장이 붓고 혈관에 균이 증식하는 병. 소, 말, 양 따위 초식 가축에 주로 발생하며 사람에게 옮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파워 오브 도그'가 버뱅크 농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조지는 관련 인물이라기 보다 일종의 외부자이자 제3자 같은 느낌이 든다.
- 인물 해석 : 로즈 고든
로즈는 자살로 죽어버린 남편과 사별하고 '레드밀'에서 아들 피터와 함께 근근히 살아나간다.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도 내색하나 못하는 소심한 성격인 로즈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조지 버뱅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거대한 목장 한 가운데 위치한 버뱅크 저택에 들어와 살게 된 로즈는 필의 적대감에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다. 장성한 아들 하나를 둔 미망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필은 대놓고 저택에 도착한 첫날부터 로즈에게 "내가 왜 당신 아주버님이야? 당신은 꽃뱀(cheap schemer)이지."라고 말한다.
필을 향한 로즈의 감정이 가장 극대화 되는 장면은 아마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저녁 만찬을 위해 잘 치지는 못하더라도 무언가를 쳐보기 위해서 피아노 앞에 앉은 로즈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씩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는데 저 멀리서 똑같은 음을 연주하는 밴조(banjo) 악기 소리가 들린다. 엉성한 로즈의 피아노 실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밴조 소리는 경쾌하고 능숙하다. 로즈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피아노를 연습하려고 하지만 다시 밴조 소리가 들리며 이번에는 더욱 더 빠르고 훌륭하게 변주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로즈는 필이 있는 2층의 난간을 노려보고 필은 로즈의 피아노 실력과 로즈라는 존재 자체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빠르게 밴조를 튕겨댄다. 결국 이 날의 만찬에서 로즈는 불안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지 못한다.
한편, 만찬이 끝난 이후부터 로즈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다. 옷장 속이나 베개 아래 혹은 집안 곳곳에 술병을 숨겨두고 몰래 마시는 것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피터는 로즈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필 역시 로즈가 집 벽에 붙어 술을 마시는 것을 우연히 몰래 보고 중독자가 되기 시작했음을 알아챈다. 로즈가 알콜 중독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키포인트다. 피터는 로즈의 모습을 보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다. 바로 필을 죽이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즈의 중독은 피터가 살인을 저지르는 가시적인 원인이자 트리거가 된다.
로즈는 이후 필과 친하게 지내는 피터를 걱정하고 두 사람이 친해지는 사실을 경계하지만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로즈는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영화에서 로즈는 처음부터 지쳐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절망이나 우울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는 조지 버뱅크와 결혼을 하기 전부터 로즈의 삶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피터가 자꾸만 엄마를 로즈를 구원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이유가 된다.
- 인물 해석 : 피터 고든
피터는 로즈의 아들로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다가 중반부가 되기까지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에서 피터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피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란 걸 관객은 어느 정도 주지한 상태가 된다.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피터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는 엄마가 행복하기만 바랐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 밖에." 이렇게 오프닝에서 피터의 대사를 들었기 때문에 관객은 피터가 필로부터 엄마를 구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영화 내내 피터가 어떤 교묘한 방식으로 필을 죽음으로 몰고가는지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나면 갑자기 아빠의 자살 역시 피터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원문) When my father passed, I wanted nothing more than my mother's happiness.
For what kind of man would I be if I did not help my mother? If I did not save her?
엄마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는 대사는 '아빠가 죽어서 엄마는 슬퍼했다. 하지만 난 엄마가 다시 행복해지면 좋겠다.'의 뉘앙스가 아니라 마치 '아빠가 죽어서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라는 뉘앙스로 들린다. 또한 나는 사내로서 엄마를 돕기 위해 아빠를 죽게 만들었다고 우회적으로 어떤 자백을 하는 것 같다. 오프닝의 나레이션은 필의 죽음 뿐만 아니라 아빠의 죽음 역시 피터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말 피터가 자신의 아빠를 죽게 만들었는지는 오로지 관객의 해석에 맡겨둔다.
피터라는 캐릭터를 분석할 때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그가 풍겨내는 이미지가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에서 확 달라진다는 것이다. 초반부의 자기 방에서 종이를 자르고 붙여 종이꽃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처럼 보인다. 피터를 연기한 코디 스밋-맥피 배우 자체가 엄청 마르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탓에 피터를 바라보는 관객은 그가 어딘가 병약하고 엄마 곁을 떠날 줄 모르는 마마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레드밀'에서 필에게 조롱을 받을 때도 크게 내색하지 못한채 그저 당하는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굉장히 연약하고 의기소침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중반부에 다시 등장하면서 관객은 피터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피터는 술에 절어 우울해하는 엄마를 위해 토끼를 잡아온다. 이 때까지는 다정하고 섬세한, 관객이 초반부에서 봤던 피터의 모습이다. 하지만 버뱅크 저택의 하녀가 토끼에게 주기 위해 당근을 들고 피터의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린다. 하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보이는 것은 토끼의 배를 갈라 피가 범벅된 내장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해부용 그림을 그리는 피터의 얼굴이다. 피터는 책을 읽다가 방해받은 사람처럼 무감한 목소리로 문을 닫고 나가달라고 한다.
이 장면부터 관객은 피터가 단순히 병약하고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이후의 피터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보이며, 피터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전혀 의기소침해하지 않는다는 걸 문득 알게 된다. 오히려 '호모새끼(faggot)'이라는 말을 듣고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으며 이런 피터의 모습은 필의 관심을 끈다. 피터는 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저자세를 취한다. 버뱅크 씨말고 필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라는 말에 순순히 따르며, 필이 관심있어하는 것-밧줄 엮기, 말 타기, 브롱코 헨리- 등을 유심히 보거나 언급한다.
하지만 피터는 필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피터에게 필은 그저 엄마를 알콜 중독으로 만들고 괴롭힌, 즉 엄마를 불행하게 한 사람일 뿐이다. 피터는 필과 함께 보내는 시간동안 천천히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이 진짜 피터의 계획만으로 움직였다기엔 너무 많은 우연이 개입한 듯 보인다. 피터는 혼자 칼을 싸들고 산맥을 올라 죽어있는 야생동물의 가죽을 잘라내어 보관한다. 이후, 말뚝을 박다가 필이 손을 크게 베이게 된다. 로즈는 술에 취해 필의 가죽을 전부 인디언 상인에게 넘겨버린다. 밧줄을 엮을 가죽이 부족해져 절망한 필에게 피터는 미리 준비해둔 야생동물의 생가죽을 물에 담아 온다. 필은 다친 손을 그대로 가죽이 담긴 물에 넣게 되고, 야생동물 사체에 있던 탄저균에 의해 탄저병에 걸린다. 그렇게 필은 밧줄을 완성한 뒤, 탄저병으로 죽게 된다.
만약 필이 손을 베지 않았으면, 로즈가 가죽을 인디언 상인에게 넘기지 않았다면, 야생동물에 탄저균이 없었다면 피터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미리 설계해둔 것처럼 차근차근 진행되어 완벽하게 피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일 뿐인지 아니면 전부 피터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특히, 피터의 진짜 면모에 대해서 많이 알게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아래의 장면이다.
- 브롱코 헨리가 말해줬는데, 불행을 견디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더군.
- 저희 아버진... 장애물이라셨어요. 장애물을 없애가는 게 인생이라고요.
- 한편으론 그렇지. 확실히 넌 장애물이 있어, 피터.
- 저한테요?
- 네 엄마라던지. 오늘도 그렇고... 해롱해롱하잖냐?
- 무슨 뜻이에요?
- 술 말이다. 진탕 마시잖아. 여름 내내 취해있던데.
- 네, 알아요. 전엔 안그러셨어요.
- 그랬어?
- 네. 한번도요.
- 아빠는?
- 제 아빠요?
- 그래. 제법이셨을 것 같은데. 술 말이야.
- 돌아가실 때까지요. 목매서 자살하셨어요. 제가 발견했죠. 제가 밧줄을 끊었어요. 제 성격이 쌀쌀맞다고 걱정하셨죠. 독하다면서요.(He used to worry I wasn't kind enough. That I was too strong.)
- 독해? 네가? 뭘 모르셨군. 불쌍한 녀석. 잘될거야.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피터가 말하는 '장애물을 없애가는 게 인생' 부분과 '제 성격이 쌀쌀맞다고 걱정하셨죠. 독하다면서요.'라는 대사가 말해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필은 피터가 착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피터 스스로 독하다는 말에 부정한다. 그러나 이미 목을 매 죽어버린 아버지는 피터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던 듯하다. 유일하게 이 장면에서 로즈의 전남편이자 피터의 아버지인 고든씨가 언급된다. 피터가 '장애물은 없애가는 게 인생'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 그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장애물이 있으면 없애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죽기전까지 술을 마셨다던 아버지는 당연히 인생에서 장애물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목매서 자살한 아버지를 자신이 발견했고, 자신이 밧줄을 끊었고, 그런 자신을 아버지는 친절하지 않고 독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는 일련의 대사를 들으며 관객은 피터가 했을 법한 범죄의 현장을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필이 탄저병으로 죽은 것 역시 피터가 어머니 인생의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행한 행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터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필에게 한번도 마음을 내주지 않고 실행에 있어서 망설임 하나 없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처럼 흘러가게 둔다. 그러나 자신은 모든 것을 세밀하게 조작하면서 가만히 기다린다.
-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의 뜻
영화 끝부분에서 피터는 필이 만든 밧줄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성경을 훑어내린다. 손가락 끝이 멈춘 곳에는 시편 22:20가 적혀 있다.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 Psalm 22 :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 시편 22 : 20
여기서 의미하는 '내 유일한 것'과 '개의 세력'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도대체 이 영화의 주제는 뭘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개의 세력'은 필이고, '내 유일한 것'은 로즈이다. 그러나 왜 하필 다른 구절도 아니고 바로 이 구절이 쓰였을까? 또한 '피터'라는 이름도 베드로의 영문식 이름인데 이를 통해 확실히 이 영화가 성경의 은유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나 기독교 부분에서는 문외한이라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한번 찾아보았다.
https://thecinemaholic.com/what-is-the-meaning-of-the-power-of-the-dog-title/
그 중 TheCinemaholic이라는 사이트에서 읽은 내용을 참고해서 설명해보자면, 영화 속에서 피터가 읽고 있는 성경은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인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해석은 다윗 왕이 시편22:20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시편 22:12, 22:13, 22:16에는 황소, 사자, 개의 공격이 차례대로 언급된다. 이 해석에서 '내 유일한 것'은 다윗 자신의 삶이며, '개의 세력'은 말 그대로 짐승인 개의 공격을 뜻한다.
다른 해석에는 이 시편 구절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며, 예수를 핍박하는 로마 정부가 '검'이 되고, 예수를 짐승의 떼처럼 공격하는 사람들이 '개의 세력'이며, 이들의 죄를 끌어안는 예수의 사랑이 바로 '내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내 유일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고 '개의 세력'은 사탄의 힘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쨌든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바는 '개의 세력'은 나쁜 것이며 '내 유일한 것'은 지켜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피터에게 나쁜 것은 '필'이 되고 지켜야할 것은 '어머니인 로즈'가 된다. 그리고 시편 22:20을 이야기한 다윗 왕은 신에게 도움을 청한 반면, 영화 속 피터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피터는 필에게 밧줄을 완성하기 위한 생가죽을 주면서 필이 자신의 덫에 완전히 걸려들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피터에게 마음을 내준 필은 서서히 덫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듯 피터는 로즈를 괴롭히는 필을 신이 벌하도록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의 세력'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이 영화의 제목이 '개의 세력(the power of the dog)' 즉, 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조금 의문이다. 이 이야기가 피터의 이야기라면 피터가 지켜야할 '내 유일한 것(my darling)'이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아무리 필이 로즈를 감정적으로 억압하고 옥죄었다고 해도 피터가 죽여야할 만큼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원래는 우울하고 소심한 로즈가 맞서야 했을 '개의 세력'을 피터가 대신해서 맞선 것이 약간 어긋난 일처럼 보인다. 피터는 로즈처럼 필에 의해 핍박을 받지도 않았고 오히려 후반부에는 호감을 얻는다. 그럼에도 피터가 로즈를 위해 나섰다는 것은 아마 피터가 로즈에게 그만큼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는 뜻 아닐까. 특히나 아들이 어머니를 이렇게 위한다는 것은 (대신 사람을 죽일만큼) 조금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이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소감
오랜만에 해석이 필요한 어려운 영화를 본 것 같다. 마치 PTA 영화 본 듯한 기분. 물론 PTA 영화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쉽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매력적인 영화인 건 분명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추천은 못하겠지만 만약 조금 작품성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