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서히 Apr 29. 2024

[서평] 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민음사

다시 이디스 워튼의 책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을 읽고 난 후, 그의 천재성에 반해버렸는데 그에 비해 이디스 워튼의 글은 개인적으로 군더더기가 다소 많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훌륭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마음속으로 서열을 매기고 있는 제 자신이 참 우습기도 부끄럽기도 했지요. 제가 뭐라고 서열을 매기고 있단 말입니까?! 이런 명작을 남겨주신 작가님들께 꾸벅 감사인사 드리기도 모자랄 지경인데요. 고작 몇 권의 소설을 읽고 그 작가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일텐데요. 그래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디스 워튼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읽혀진 소설입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 것 같지만요.


이 소설은 일전에 소개해 드린 <여름>과 쌍둥이 소설로 불리울 만큼, 주제의식 및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하지만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적 소용돌이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또는 나뭇잎을 흔들 정도의 산들바람이라면, <이선 프롬>의 그것은 한겨울 눈보라 속 강풍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저는 이 책을 겨울에 읽어 보실 것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햇살좋은 봄날 또는 사방이 푸르른 여름날 이 책을 읽고 나면, 온 세상이 어두운 무채색으로 변하는 무거운 경험을 하실테니까요. 


[내용 요약] -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께서는 점선 부분 스킵해 주세요.


나는 업무차 작은 시골 마을에 당도했고 이곳에서 몇 개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우체국 앞에서 우연히 '이선 프롬'이라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를 보았고 그의 꺼져가는 얼굴과 불편한 다리를 보며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나는 이선 프롬의 과거에 대해 퍼즐을 짜 맞추었고 마침내 제가 풀어 낸 퍼즐은 아래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젊고 건장한 이선 프롬은 가난했고 질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농장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보살피기 힘들었던 이선은 어머니의 병간호를 적극 도와 주고 있는 친척 누나 '지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녀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나마저 병을 앓게 되면서 이선의 병간호는 계속 이어집니다. 지나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은 집안일을 할 수 없고 휴식을 취해야 하니 자신의 친척 중 오갈 데 없는 '매티'를 집으로 불러 집안일을 맡기자고 이선에게 제안합니다. 이선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서 새 식구를 들여 그녀의 숙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지나의 건강 회복을 위해 허락합니다. 그렇게 이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매티는 젊고 아름다운 생기발랄한 처녀였습니다. 마을의 젊은 총각들이 매티에게 눈독을 들였고 이선은 점점 그런 상황을 질투하게 됩니다. 

많은 시간 침대에 누워 있는 지나로 인해 이선과 매티는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나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지나는 남편에게서 매티를 떼어내기 위해 집안일을 전문적으로 잘 할 수 있는 다른 여성을 매티 대신 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매티는 집안일을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아 미숙한 게 사실이었고 지나는 자신의 병이 더 악화된 것을 빌미로 보다 전문성있는 일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선에게 강조합니다. 이선은 매티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져 버렸기에 처음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 하지만 사회의 통념 앞에 결국 무너집니다. 이선이 아무리 매티를 사랑하더라도 그는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기에 사회 통념 상 매티와 함께 도망가거나 지나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아픈 아내를 대신할 일꾼으로서 자신이 끝까지 매티를 고집하는 것도 명분이 없었기에 분명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선은 매티를 내보내기로 합니다. 


매티를 기차역까지 태워주기로 한 날, 이선의 마차에 나란히 앉은 이선과 매티는 그동안 감춰 둔 서로를 향한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그리고 이선은 가는 길, 잠깐 멈춰 서서 매티에게 마지막 썰매를 태워줍니다. 썰매를 함께 타고 내리막을 쏜살같이 내려온 그들은 헤어짐이 다가오는 것을 너무 괴로워 한 나머지, 무서운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선 아저씨! 이선 아저씨! 썰매를 한 번 더 태워 주세요.
어디로 내려간단 말이야?
저 비탈길이요. 어서요. 우리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말이에요.


둘은 다시 썰매에 앉아 큰 느릅나무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내가 이선의 마차를 얻어타던 날, 우연히 이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나는 그의 집에서 지나와 매티를 보았습니다. 매티는 척추병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계속 불평을 해댔고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내자 잠깐 중얼거림을 멈추었습니다. 지나는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집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소리가 들려도 절대 그쪽을 돌아보는 일 없었지요. 

제가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헤일 부인은 그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또 이런 말도 해요. 만약 매티가 죽었더라면 이선 씨는 살았을 거라고요.
지금 모습을 봐서는 농장에서 사는 프롬네 사람들이나
무덤 아래 있는 프롬네 사람들(이선 프롬의 묻혀있는 조상들)이나
이렇다 할 차이를 모르겠어요...

이 소설은 출간 이후 많은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 소설이 오히려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소설의 결말이 결국 너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이 났기에 오히려 불륜을 심판하고 터부시함으로써 극강의 보수주의를 고집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거든요. 

저는 이디스 워튼이 특정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보진 않습니다. 이디스 워튼은 단지 이야기를 좇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든, 어디선가 흘려 들은 이야기이든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쓰고 싶어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렇게 파격적인 스토리는 이디스 워튼으로 하여금 정말 써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 액자식 구성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등장인물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여 자신이 이선 프롬에 대해 들은 이야기 조각들을 끼워 맞추며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죠. 그렇게 이선 프롬과 독자 간 '나'라는 인물을 개입시켜 거리를 유지시킴으로써 독자들이 이선 프롬의 비극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게, 그래서 그 충격과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게 장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이 이야기를 쓰면서 이디스 워튼이 느낀 충격과 공포가 대단했을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만약 액자식 구성이 아니라 이선 프롬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마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극강의 비극적인 감정을 독자들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을 겁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당시 젊은이들에게 자살 붐이 일어난 것을 상기해 보면 이디스 워튼의 이러한 배려가 참 따뜻하게 느껴 지기도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서평] 남아 있는 나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