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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Use Aug 24. 2021

배우지 않은 자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

마이클 샌델 作 - <공정하다는 착각>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가치관을 크게 흔들어 놓은 3권의 책 중 하나가 되었다.



학력주의라는 편견은 성공한 자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준다.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아도 그에 대해서는 별로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에 대해서 말이다.(14p)


서문에서부터 나는 의문점이 들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능력주의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누가 앞서가고 있으며 그것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샅샅이 밝힌다. 능력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물림하고야 마는 사회. 마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연상시킨다.



미국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옆문 뚫기다. 개인에게 뇌물을 주고 시험 문제를 사거나 가짜 시험 점수를 만들어 내는 등의 불법적인 일이다. 두 번째는 뒷문 입학이다. 기부를 통해 들어가는 건데, 합법이며 그들이 기부한 돈은 교육조건 개선이나 불우한 이들의 장학금으로 쓰인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정문으로 들어간 이들은 부모의 돈에 상관없이 오직 본인의 능력과 실력으로 들어왔을까?


실제 SAT 점수와 집안 소득은 비례한다고 한다. 아이비리그 출신 아이들을 보면, 미국 소득 하위 60%의 집안에 살고 있는 학생보다 상위 1%의 집안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부잣집 학생들은 날개를 달고 정문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그리고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나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것은 청소년들에게 지나친 부담으로 다가온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60p)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 어려워진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세습화 시키며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르게 된다.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 1000억대의 연봉을 받는 농구선수가 있다. 그건 과연 그의 능력과 노력 덕분일까? 물론 그는 엄청나게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는 말한다. 나도 그 정도로 노력할 수 있다고. 나는 오히려 그것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실제 마이클 샌델 교수는 27살에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된 엄청난 능력자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그 농구선수와 같은 연봉을 받으며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 농구선수에게는 재능도 있었을 테고, 키 같은 외적 요인들도 많이 작용했을 테니까. 재능을 발견하는 것도 상황과 환경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발견했다고 해도 교육에 들어가는 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재능을 찾아서 발휘했다면 그 모든 걸 누릴 자격이 될까? 실제 그만큼 노력한 미국의 세계 챔피언 역도선수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역도가 미국에서 비주류의 스포츠라는 이유로 월 50만 원의 돈을 받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했지만 또 다른 요인으로 결과는 달라졌다. 만약 이 농구선수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역시 뛰어난 재능이 있고, 노력도 했겠지만, 앞마당에서 농구를 하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특정한 가정환경, 국가, 사회, 시대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능력주의의 나라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솔깃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는 말한다. '하면 된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진보정당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개인에게 돌린 것이라고. '하면 된다'라는 말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건 당신 탓이에요. 대학에 가지 않은 당신 잘못이죠.



유럽의 복지 국가 사람들은 성공이 오직 나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 사람들은 성공은 오직 나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오직 자기 외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할 사람이 없다면 최고의 자리에 서는 사람과 최저의 자리에 서는 사람 각자의 사회적 위치가 정당화된다. 부자는 부자일만해서 부자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가장 잘나가는 사회 구성원이 자기 이외의 요인, 가령 행운이나 신의 은총이나 공동체의 지원 덕분에 그 자리에 섰다면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의 운명에 힘을 보태줘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힘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체라는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28p)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151p)


가진 능력에 대해, 내가 이루어낸 것에 대해 겸손하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물론 능력은 중요하다. 능력에 따른 평가는 좋은 원칙이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능력 있는 의사를 찾을 것이며,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164p)


작은 글자만으로 채워져 있는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걸까? 다른 해답이 있을까? 무엇이 가장 올바른 방법일까? 후반부에 가서야 답이 나온다. 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동에 대한 소득은 과연 어떻게 주어져야 할까?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유일한 답일까?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그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아플 때 병가를 낼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동료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다면. 적어도 기본적인 것들이 충족된 다음에 수요와 공급에 따라 소득이 정해져야 한다.


문제는 삶의 품격을 유지할 기본적인 것을 보장해주지 않고 시장 논리에 너무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 만일 카지노를 운영해 돈을 버는 사람의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할까? 코로나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보다 중요할까? 샌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보상 기준은 공동선에 대한 기여도이다.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도덕적인 질문을 시장에만 맡겨 놓는다면, 일의 가치를 뒤로한 채 카지노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 시민으로서 무엇이 공동선에 기여하는지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노동자가 공동선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사회적 기여에 비해 적은 보상을 받는 노동자는 누구인지, 훼손된 일의 존엄성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차근차근 고민해 나가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이상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 사람 씩 능력주의의 잘못됨을 깨닫고, 타인을 대하는 의식부터 느리더라도 천천히 변화해 나간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불평하는 건 보통 그 이상에 대한 게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불평이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 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들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 (1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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