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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tif Apr 17. 2024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Ray & Monica's [en route]_145


신의 선물



지난 4월 1일 이사를 했다. 이사 후 보름을 이곳에 살아보니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계량화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길 건너 집 아저씨는 우리보다 먼저 'Hola' 외쳐준다. 옆집 청년은 이웃집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집의 이웃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물 배달 아저씨는 우리 집에도 멈추어 필요를 묻는다. 이웃집 할머니가 자신의 정원에 핀 재스민 꽃 가지를 꺾어 아내에게 선물했다.


이곳은 멕시코 시골과 도시의 중간 어디쯤의 정서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살피고 느껴보기 위해 여행자와 정주자의 경계를 살아보기로 했다. 여행지의 역사문화유적을 통한 과거의 삶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미래의 역사가 될 바로 이 시간의 소소한 일상을 함께 살아보는 것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곳 체류가 길어지게 된 것은 옥스나르 때문이다. 단지 며칠 밤의 유숙을 위해 머물렀던 집에서 대화가 많아지다 보니 옥스나르의 여러 사정을 알게 되고 옥스나르는 우리에게 손님 이상의 정을 주었다. 우리는 바하칼리포르니아 최남단까지의 종주를 끝내고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는 영업용 게스트룸대신 리뉴얼 중이던 자신의 방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여동생이 사용하고 있는 본채의 다른 방을 사용했다.


여동생과 부엌과 샤워룸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동생은 아버지가 달라 성장기를 함께한 적이 없고 공부를 각기 다른 도시에서 마치고 일 때문에 함께 살게 된 상황임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불편이 더 커겠다 싶었다.


우리가 다시 행장을 꾸리려 할 때 옥스나르는 몸씨 서운해하며 이웃한 곳에 사글세 집을 구해보겠다며 자신의 영업공간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체류만료까지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서 방을 구하는 것이 싶지 않았다. 최소 6개월 이상 주거에 보증금을 필요로 했다.


우리의 거취 결정을 3월 말까지로 데드라인을 그었다. 데드라인을 하루 앞둔 전날까지도 염두에 두었던 집과의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월세를 더 올려주고 체류 기간을 줄이는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알뜰한 옥스나르는 돈을 올리는 협상은 끝까지 원치 않았다. 본토로 가는 배편을 예약하려는 마지막 날, 비로소 다른 집을 구했다고 했다.


함께 트레킹을 했던 Cerro Atravesado 산에 훨씬 가까워진 곳으로 옥스나르 집에서는 2.5km, 걸어서 40여 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이 집은 2층 양옥의 1층 단칸방으로 최근 에어비앤비 숙소로 활용하기 위해 새롭게 방을 단장한 곳이다. 방은 넓었지만 장기적 체류에서 필수적인 주방시설이 없었다. 주인과 전기스토브를 사용한 조리를 허락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옥스나르는 자신의 방에서 우리가 사용하던 집기 일체를 실어다 주었다. 전기스토브뿐만 아니라 냄비와 접시, 아이스박스, 책상과 의자까지...


이사를 마친 첫날밤 메시지가 왔다.


"Cómo están? Todo bien?(어때요? 괜찮으신가요?)"


다음날 밤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그립습니다. 제 곁에 계시지 않으니 기분이 이상합니다.(Los extraño, me siento raro, no tenerlos cercas de mi.)


그 후로도 매일 밤 안부를 묻는다. 물론 자주 집으로 찾아온다. 돌아갈 때는 꼭 자신이 우리의 부모가 된 것처럼 말한다.


"문은 꼭 잠그세요. 밤에는 절대 나가시면 안 됩니다."


그와 Cerro Atravesado 산을 올랐을 때, 왔던 길이 아니라 '저곳'으로 내려가 보자고 했을 때 옥스나르가 말했었다.


"안돼요. 저곳은 걷기에는 위험한 곳이에요."


"그때 '저곳'이라고 했던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떤 곳이든 그곳의 내부자가 되어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를 익히고 나면 오히려 더 외부인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다.


옥스나르 엄마, 재클린도 무시로 방문한다. 들어오면서 첫마디는 항상 동일하다.


"오늘은 엇댔나요?"


이사 직후에는 '오늘도 무사하셨나요?'로 들렸다. 재클린에게 우리 부부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보이는 듯했다.


그다음 날 방문 때는 웃으면서 들어왔다.


"어젯밤 옥스나르가 전화하는데 받지 않아서 걱정했다고 하던데요. 이웃집 장례식에 가서 전화를 못 받으셨다고요?"

"조문을 가서 전화를 받기는 곤란해서요."

"누가 돌아가셨던가요?"

"터너Turner라는 47세의 가장이었어요."

"젊은 분인데... 왜 돌아가셨데요?"

"심장마비라는군요. 부인께서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보내드리고 싶다고 해서 집으로 모셨답니다."


그 후부터는 재클린의 첫 인사말이 달라졌다.


"오늘은 무엇을 하셨나요?"


우리가 잘 적응한 것을 확인한 옥스나르와 재클린의 마음이 비로소 안도하는 듯싶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마을에서 발견한 유용한 정보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재클린은 아내가 가방을 고친 그 장인에게 그동안 쌓아놓았던 고장 난 가방을 모두 가져와서 고쳤다. 옥스나르는 일식이 있었던 날, 우리에게 일식 관찰이 쉽도록 엑스레이 필름을 빌려주었던 앞집의 자동차수리점 형제에게 자신의 자동차 수리를 위한 견적을 받았다.


어젯밤 재클린의 이웃 어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방문해 왜 아이스박스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얼음 두어 봉지를 사다 넣어도 하루 만에 모두 녹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아이스박스를 냉장고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시장에서 하루치 이상을 사게 되어요. 그래서 매일 시장에 가기로 했고 하루치 이상의 재료를 사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아이스박스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얼음을 사지 않으니 시장 가방이 훨씬 가벼워졌어요."


하지만 재클린은 다음 달을 걱정했다.


"지금도 한낮 기온이 33도인데... 다음 달에는 더 더워지고 그다음 달에서 더 더워져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지금 작은 냉장고를 하나 사는 것은 어때요?"


"볕이 이렇게 뜨거운 지금도 여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염려 마세요. 우리는 지금 하루에 한 번 시장에 가지만 다음 달에는 두 번 가면 됩니다. 더 더워지면 3번가면 되고요."


밤이면 더욱 짙어지는 자스민의 향. 아내가 선물 받은 자스민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밤의 불면이 길어진다.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 꽃은 사랑과 순수, 환대와 행운, 영적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가 원산이라는 이 꽃은 어찌하다 이곳까지 와서 꽃을 피운 것일까.


우리에게 발길 닿는 어느 곳도, 어떤 순간도 '신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다.


#이사 #신의선물 #멕시코 #라파스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 #멕시코 #세계일주 #모티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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