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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Apr 25. 2022

[MINKU's PICK]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말을 잘 한다는 것, 그것은 통념적으로 타인을 설득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만들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며 플라톤의 대화편 중 ‘고르기아스’ 편의 고르기아스와 폴로스가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이러한 사회통념에 일갈을 가하고 있다.     


  본문에서 소크라테스가 가하는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말해지는 ‘말을 잘 하는 것’, 곧 연설술이 목표한 바를 제대로 이룰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그런 행동이 이익이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이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통념상 말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이며, 설득하는 이유는 나의 말이 옳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잘 하는 순간 옳고 그름에 대한 어떤 확고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말에 따르면 연설가는 제대로 된 지식 없이도 연설술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고르기아스가 말하는 연설술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행위는 가능한 한 좋은 것을 목표로 하므로 연설술 역시 좋은 것을 목표로 할 텐데, 연설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으므로 그가 심어주는 확신은 잘못된 것이기 쉽다. 좋은 것을 목표로 했는데 잘못된 길을 간다는 것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 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므로 연설술은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을 제대로 된 기술이 아닌, 그럴듯한 즐거움만을 목표로 하는 ‘아첨’으로 본다.     


  다음 문제는 이런 연설술이 이로울 수 있는지이다. 이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인다. 애초에 연설술의 목적이 나의 의도대로 타인을 움직이는 것이고, 나는 당연히 내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위와 거의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익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할 뿐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좋고 나쁨을 판단할 지성이 없다면, 연설술은 그저 주사위를 던지듯 오지 않은 미래를 운에 맡기는 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큰 이익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고르기아스 편에서 논의되는 내용 중 절반 이상은 ‘연설술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무색하게도 참된 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본문의 논의는 이런 식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며 연설술에 관한 내용은 이 이상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분량도 연설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고르기아스와의 대화보다 정의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칼리클레스와의 논의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저작이 ‘정의에 관하여’가 아닌, ‘연설술에 관하여’인 이유에 대해 오래전부터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대화편은 누가 뭐래도 연설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소크라테스 자신이 참된 연설술이 무엇인지, 진실로 말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연설술은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전혀 쓸 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고르기아스를 비판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르기아스가 옳고 그름을 연설술을 통해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으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모든 기술은 적용되는 대상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라는 명제에 위배된다. 연설술이 쓸모가 있는 것은 그가 정의에 대한 지식을 먼저 갖춘 후이다. 그 후에 그것은 꽤나 쓸모가 있다. 바로 지식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실제로 필레보스 편에서 이러한 설명이 있다.) 이 경우 연설술은 아첨의 지위를 넘어 기술의 영역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여러 대화편에서 보여주듯, 그는 일종의 민중계몽을 목표로 했으며 시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정치가라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철학의 청자를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기술은 매우 유용하며 적용되는 대상인 청자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말 잘하는 법은 올바름에 대한 지식이 선행한 이후에 성립하며 그것을 잘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본 대화편에서 몸소 그 예를 보이고 있다. 먼저 고르기아스와의 대화에서,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지식에 오류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폴로스와의 대화에서는 그에게 질문권을 양도하면서 몸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실험해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여러 비유와 긴 연설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련의 교육적 흐름이 제대로 된 말 잘하는 법의 실례이며 아마도 이것을 보이기 위해 고르기아스편은 다른 대화편들과는 다른 양식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작품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올바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칼리클레스의 생각은 저자의 다른 대화편인 국가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의 논의와 일견 유사하다. 트라시마코스는 스스로 올바름을 정의하면서 말하기를 ‘강한 자의 편익’이라 했고,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정리하자면 “더 못하고 더 약한 자들의 소유물은 더 낫고 더 강한 자들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둘의 생각을 비교해서 읽으면 더 재밌다. 잠시 고르기아스편에서 눈을 떼고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에 관한 입장은 기존의 통념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아 이해가 쉽지 않았다. 본문에서 그는 올바름을 ‘강한 자의 편익’으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법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강한 자이며 강한 자는 당연히 자신의 편익을 위해 법을 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강한 자’의 개념이다. 만일 강한 자가 실수로 잘못 판단을 내린다면, 강한 자의 손해가 올바름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트라시마코스는 강한 자가 강한 자인 한에서는 어떤 실수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일종의 ‘강한 자의 이데아’를 설정하여 논박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다음 난점은, 올바름 역시 일종의 기술일 텐데, 기술은 완벽하게 기술인 한에서는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의 편익을 위한다는 것이다. 의술은 환자의 편익을, 그리고 항해술은 배 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이 난관 앞에서 트라시마코스는 논의의 토대부터 흔들며 빠져나가고자 한다. 바로 ‘올바름은 강한 자의 편익이지만, 올바르지 않음은 자신의 편익이다.’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라 사료된다. ‘올바름은 강한 자가 제시한 “규정”에 따라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고 올바르지 못함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 그러면 이후에 ‘올바르지 않음이 올바름보다 이익이 된다.’는 문장과도 맞다.     


  정리해 보자. 그의 주장은 강한 자가 자기들 멋대로 올바름의 기준인 ‘법’을 만들기 때문에 올바름은 강한 자의 편익이며, 따라서 개인의 입장에서는 올바르지 않음이 올바름보다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즉, 트라시마코스가 지적하는 부분은 ‘올바름의 이로움’에 관한 부분이다.     


  이제 칼리클레스를 살펴보자. 그는 조금 다르다. 그는 논의를 시작하면서 올바름에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인위적인 법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법이다. 전자는 후자보다 이후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반면 후자는 본질적인 차원의 법이다. 따라서 자연법을 따르는 것을 정의로 본다.      


  본래 인간도 자연 상태에서는 하나의 짐승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자연법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 상태의 생물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터이다. 보아하니 자연 생태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바로 약육강식이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문제 삼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또 이빨이 빠져서 약해진 늑대는 무리에서 쫓겨나 생을 마감한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밀려난다. 이것이 칼리클레스가 파악한 자연법의 정체였다. 나아가 강한 자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치와 무절제가 진정한 행복이며 덕이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약자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이런 것들을 안 좋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상이 바로 칼리클레스가 주장하는 자연법의 정체이다. 이런 팍팍한 환경을 견디지 못한 나약한 호모 사피엔스들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인위적인 법이다. 다시 말해 이 법은 자연 상태에 머무르면 손해를 보는 약한 자들이 모여서 합의하에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충분히 강한 자는 이러한 허상을 부수고 군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또한 이것을 정의롭다고 한다. 즉, 칼리클레스가 지적하는 부분은 ‘올바름의 올바름’이다.      


  여기서 잠깐 왜 플라톤이 근본인지 영업을 한 번 더 해야겠다. 칼리클레스의 논리는 자꾸 독일의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이 아니었던가? 듣자하니 니체에 크게 심취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뭔가 다르다고, 니체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하더라. 정말 그렇다면 니체 이 양반 글을 잘못 쓴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어본 바 도덕계보학의 내용은 칼리클레스의 주장과 대동소이했다. 심지어 나만 그렇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히틀러도 니체를 나처럼 이해했다. 히틀러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래서 니체가 틀렸다고 생각한 반면, 히틀러는 그래서 열등종자들을 척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그려낸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와 논쟁해서 그의 주장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1800년대의 니체에게 기원전의 플라톤이, 무려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답을 내려준다. 이것이야말로 고전의 힘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양자는 모두 ‘법’을 주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트라시마코스의 법 개념은 칼리클레스의 ‘인위적인 법’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생겨난 최초의 원인에 대해 둘은 다른 의견을 낸다. 트라시마코스에게 법은 강자에 의해 제정되며 강자를 위해 봉사한다. 반면에 칼리클레스에게 있어 법은 약자들이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끌어낸 합의점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플라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양쪽에 펼친 반론이 꽤나 다르다. 트라시마코스에게는 올바름이 인간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반면, 칼리클레스에게는 올바름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이라는 것, 그리고 불의가 본성적으로 부끄러운 것임을 보이려 한 것이다.      


  칼리클레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이 작품의 본래 주제인 연설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첨언하자면, 사실 이는 이익을 위한 게 아닌 참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이기 때문에 변증술(dialektike)이라고 불러야 한다.) 같이 생각해보자. 욕구는 언제나 결핍에 대한 욕구이다. 만일 칼리클레스의 주장이 옳다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곧 기쁨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많은 경우 고통스러운 동시에 기뻐한다. 단적인 예로 갈증이 있다. 갈증이 있을 때 물을 마시는 것이 기쁘다. 갈증이 없을 때 물을 마시는 것은 고역이다. 즉, 물을 마실 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상태는 갈증상태이다.      


  다시 칼리클레스의 주장으로 돌아가서, 욕구의 충족이 기쁨이고 이런 삶이 잘 사는 삶이라면, 그리고 역으로 결핍이 못 사는 삶이라면 위의 갈증 해소는 잘 살면서 동시에 못 사는 경우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 이상하다. 어떻게 잘 살면서 동시에 못 살 수 있는가? 결론이 모순이므로 가정이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귀류법이다. 좋은 것들과 기쁜 것들은 같지 않고, 나쁜 것도 괴로운 것과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기쁜 것들 중에서도 좋음과 나쁨이 있을 수 있고, 괴로움 중에서도 좋음과 나쁨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이상으로 욕구의 충족과 도덕을 동일시한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논박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논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는 생략한 더 많은 단계들, 그리고 몇몇 비약들을 통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낸다. 그 지경에 이르는 논증은 아무래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사실 나 스스로도 완벽히 동의한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논박은 완벽하다고 생각되어 소개해 봤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서 확인하세요.     


  여기까지 고르기아스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다. 내가 소개한 내용은 진짜 새 발의 피다. 대충 생각해봐도,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폴로스와의 논쟁은 아예 말도 안 했다. 그것도 재밌는데 아쉽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한 자루 도끼가 되어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부순다. 그리고 우리가 철학에서 정말로 배워야 하는 것은 이론이나 이름 따위가 아닌, 바로 도끼질 그 자체이다. 철학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얼음을 깰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플라톤 역시 마찬가지다. 이데아론이니, 철인정치니 하는 것들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요즘 철학계에서 그런 얘기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서양철학이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한 것은, 우리가 플라톤식으로 도끼질을 하기 때문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잘’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 플라톤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최고의 선생이다. 뭣들 하고 있나? 빨리 교보문고 들어가서 장바구니에 담자. 참고로 번역은 정암학당에서 번역한 게 제일 좋다. 제일 쉽게 읽을 수 있는 건 천병희 선생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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