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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Nov 30. 2022

[현상학 탐구] 데카르트와 지식의 토대로서의 코기토

  누구나 철학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철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철학자는 아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제대로 일하는 철학자와 아무말쟁이들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궤변가들은 자신들의 궤변을 몇 줄 만에 읊어놓는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참된 철학자는 논문을 써야 한다. 개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쉬운데 이를 논박하는 일은 어려우니 세상에 개소리가 판을 친다. 이런 폐단은 무려 소크라테스 시절부터 있던 일이다. 그가 주구장창 가르치는 바는 철학자와 궤변가(소피스트)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무엇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가? 바로 앎(episteme)이다. 그것도 그냥 앎이 아니고,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실에 대한 내용을 끝까지 파헤쳐서 길어낸 앎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런 앎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완전하고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한계 때문이든, 시대적인 역량 때문이든, 우리는 어느 정도는 억견(doxa)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해 episteme를 추구하는 마음이 철학자를 철학자로 만든다. 그래서 철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은 대화와 소통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류하며 여러 학설들을 접하고 그 중 가장 탁월한 것을 선택한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 과정은 매우 어렵다. 보통 이 어려움들은 ‘용어가 난해하다’라는 말로 일축되곤 하지만 사실 학자들의 문제의식 자체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학자들이 사용하는 난해한 용어들은 딱 그렇게 씀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함축한다. 단적인 예로 칸트가 많이 사용한 ‘a priori’라는 표현을 주목해보자. 라틴어 뜻 그대로 풀자면 이는 ‘~보다 앞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 앞에서인가? 경험보다 앞서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한자어로 풀어서 선험적(先驗的)으로 바꾸자. 그런데 이 용어는 먼저 경험에 대한 개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a priori’는 경험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 형식이다. 그렇다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超越的), 혹은 초험적(超驗的)이라는 표현은 어떨까? 아니다. 이 경우는 경험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적 형식 사이의 우열관계가 있다고 읽힐 우려가 있다. 용어 하나를 결정하기 위해 학자들은 무수한 논의를 거치고 주석을 단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칸트에게 있어 도대체 왜 문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글을 웬만큼 읽었는데 도저히 문제의식을 파악할 수 없다면 덮는 게 낫다. 그 글은 나에게 맞지 않는 글이다. 내 경우에는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그런 책이었다. 이런 작품에 대해서는 좋은지 안 좋은지 파악할 수도, 논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문제의식이 파악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정당한지를 따져야 하고, 이후에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이 논리적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논의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따져야 한다. 한 가지 예로 뤼스 이뤼가라이를 들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였던 그는 성차별적인 사유가 불어 체계 내에 녹아있다고 비판했다. 남성명사인 비행기(l'avion)는 여성명사인 자동차(la voiture)를 내려다보고 남성명사인 소파(le sofa)는 여성명사인 의자(la chaise)보다 고급품이다. 군대에서 불어를 독학할 때 이 말을 믿고 단어를 외웠는데 다 틀렸다. 또 다른 예로 보드리야르를 들 수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진리가 없으니 학문을 포기해야 하는가? 이런 주장은 철학자로서 온당치 못한 것이다.     


  현상학이라는 사조는 위의 분류에 입각해 볼 때, 나에게 문제의식조차 이해할 수 없던 글이었다. 그런데 최근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이 국내에 새로 번역되었기에 읽어보았다. 그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현상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지식이 많이 짧지만 할 수 있는 한 생각날 때마다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현상학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이 사조의 선구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문제의식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첫 주자는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유명세에 비해 그 사유가 매우 심원하다. 그의 생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 방법은 흔히 방법적 회의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방법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이다. 먼저는 도구적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득세하던 피론주의(회의주의)와는 달리, 데카르트의 회의는 단지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닌 엄밀학으로서의 학문을 세우려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는 구체적인 절차로서의 방법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하나는 급진적이고 과장적이라는 의미이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우선은, 신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감각과 같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는 것들마저도 데카르트는 의심한다. 또 하나의 의미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꿈이나 악령의 가설 등의 지나칠 정도의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데카르트는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즉, 데카르트의 철학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어떤 ‘의지’이며, 나의 의지가 곧 나의 존재이다. 이하에서는 데카르트의 주저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이하 성찰)”에서 전개되는 순서를 따라 그의 철학을 파악함으로써 현상학의 문제의식을 살피고자 한다.     


  성찰은 우선 방법적 회의로 시작한다. 유사한 내용이 방법서설에도 등장하지만, 방법서설과 성찰의 내용은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에서 방법적 회의의 목적은 표상과 대상의 일치여부를 문제 삼는 것이다. 반면 성찰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대상의 현존 그 자체이다. 그래서 양쪽 모두 꿈의 논증이 등장하지만, 방법서설의 경우 꿈은 참과 거짓 여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치로서 등장할 뿐 그것의 현존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반면 성찰에서 꿈의 논증은 실상과 허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장치로서 등장한다. 다시 말해, 방법서설의 논의는 인식론적이지만 성찰에서의 논의는 존재론적이다. 두 경우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거대한 혼란을 마주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 정신을 속인 전적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일 텐데, 이제 와서 보니 안 그런 게 없는 것 같다! 우리의 감각도, 수학적 공리도 어떤 장난꾸러기 정령이 와서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없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나는 속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여기에 사과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사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외부 대상이 현존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외부 대상이 현존한다고 느낀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는 의심할 수 있지만, 내가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 내가 그렇게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vidre video)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외부 세계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은 더할 나위 없이 명증하게 우선적으로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향한 의식의 지향, 다시 말해 사유(cogito)의 사실로부터 내가 있다(sum)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때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 명제는 논증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사유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연역적 추론의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인지방식을 통해 나의 존재는 명증하고 자명하게 주어진다. 이를 직관이라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더 이상 논증될 수 없는 수학적 공리와도 같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당대 데카르트를 향한 대부분의 비판은 바로 이 부분에서 야기되었다. 이하에서 몇 가지 비판을 살펴보자.     


  하나는 가상디의 비판이다. 그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대전제를 결여한 삼단논법이라고 비판했다. 나의 존재가 연역되기 위해서는 나의 사유와 더불어 ‘사유하는 자는 존재한다.’라는 대전제가 필요하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엄밀한 토대를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데카르트에 대한 오해다. 코기토는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되는 것이다. 사유하는 나의 존재는 체험적으로 자명하게 주어진다. 이런 설명이 경험주의로 오해될까 우려스럽다. 그렇지 않다.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보편진리가 분명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다. 나는 나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부터 보편진리인 “생각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귀납 추론한다. 즉, 대전제가 먼저 주어지고 이로부터 연역추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코기토를 직관하고 이로부터 대전제를 귀납적으로 추론한다.     


  두 번째 비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데카르트의 친구였던 부르댕(Bourdin) 신부의 비판인데, 요약하자면 “너는 생각하고 있다고 꿈꾸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다.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변은, 코기토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기토는 직관하는 것이다. 나의 사유함 자체에 대한 반성적 사유는 무용하다. 사유함은 사유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상의 현존에 대한 의심은 실체와 표상 사이 거리에서 발생한다. 즉, 자기 자신이 아닌 것만 의심할 수 있다. 부르댕의 비판이 중요한 것은 서양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유는 무엇에 대한 사유이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즉, 대상 없는 의식은 없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이들은 주체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이 비판하는 주체는 내용이 없다. 주체는 언제나 탈자적 존재, 자기 자신임을 포기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주체는 자신 밖으로 나가 세계와 관계를 맺음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의식작용 없이는 대상이 의식되지 않는다. 또한 의식 대상 없이는 의식작용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주체성은 의식하는 능력을 의미하고, 대상성은 의식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둘은 대상이 나타나는 과정 속에서 동일한 역할을 한다. 주체 고유의 자리는 언제나 빈 자리였으며 늘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들의 등장 이전의 역사를 주체의 시대로 비판하며 타자의 시대를 주장하지만, 사실 기존의 역사에서 주체의 시대와 타자의 시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주체는 타자 없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는 내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근원은 서양 철학 기저의 확고한 믿음이다.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거리 속에서의 나타남이다”라는 인식론의 근본전제가 오류의 원인이다. 인식론적 거리는 ‘나타나는 것’과 ‘나타내는 것’을, 즉 대상과 주체를 분리하며 오직 그런 인식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구도 속에서 ‘나타내는 것’은 자신의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본성을 잃고 ‘나타나는 것’으로 변질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 즉, 주체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이런 문제적 전통은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져 피히테의 ‘초월적 자아’로 연결된다. 진정한 자아는 무한히 물러나며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대상뿐이다. Bourdin 신부는 바로 이것을 묻고 있다. 어떻게 무언가가 직관될 수 있는가? 어떻게 cogito가 cogito 자신으로서, 사유함이 사유함 자체로서 주어질 수 있는가?     


  데카르트의 대답은 거리속의 나타남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의 나타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제껏의 관조적 인식이 아닌, 대상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직관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탈자적 작용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직관, cogito 자체에 대한 직관은 순수한 내재성이 나타나는 작용이며 인식론적 거리가 없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이 답변에 대한 미셸 앙리의 해석은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2002년에 소천한 이 철학자에 대해서는 이후 현상학 시리즈의 한 챕터로서 다뤄볼 계획이지만 여기서 일부 소개하겠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두 가지 인식작용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외부 세계, 즉 대상에 대한 인식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주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코기토에 대한 직관이며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즉, 코기토는 순수한 내재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주체성을 의미한다. 이제 주체성과 대상성이 구분된다. 주체성은 곧 자기성, 순수한 내재성이며 감정(sentiment)과 정동(affection)을 포함한다. 이것은 기존에 논의되던 동일성, 개체성과는 다르다. 동일성은 시공간에 대한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때 시공간은 펼쳐진 세계이다. 그러나 자기성은 세계 이전에 존재하며 시공간에 무관하다. 이 주체성의 탈자적 작용,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외부 세계의 대상들이 인식되는 것이다.     


  좋다. 사유하는 것으로서 나의 존재가 직관되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첫째로, 나의 존재와 같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즉, 다음 과정은 나의 존재로부터 다른 무엇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존재와 같이 직관되는 사실들을 찾는 것이다. 내가 감각하는 대상들의 존재는 아직 불명확하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감각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만이 명확하다. 나의 표상과 대상의 실재 사이 일치 여부는 모른다. 다만 대상에 대한 어떤 표상을 갖는다는 사실만이 명확하다. 그런데 때로 표상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등장한다. 즉 표상은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당연하지만 이로부터 표상과 대상이 유사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대상이 원인이 되어 표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표상은 나에게 나타나는 허상인 반면 대상은 실재이다. 대상으로부터 표상이 나타난다는 말은 결국 실재성이 큰 것으로부터 실재성이 작은 것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자명하게 무한한 실재성을 가진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애초에 나의 존재에 대한 직관은 나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을 필함한다. 그리고 유한성은 무한성에 대한 관념을 함축한다. 즉 나의 존재에 대한 직관은 무한한 존재에 대한 직관을 필함한다. 우리의 논의 전개 순서에 따르면 나의 존재가 먼저 직관되었고, 이로부터 무한한 절대자, 편의상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가 직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다. 신의 무한성에 대한 직관과의 대비로서 나의 존재에 대한 직관이 가능하므로 신의 존재가 먼저고 나의 존재가 나중이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상상의 동물들, 이를테면 용도 존재한다는 말이냐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용에 대한 관념은 용의 현존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에 무한한 실재성으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은 당연히 신의 현존에 대한 관념을 포함한다. 애초에 실제로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한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의심한다는 사실, 즉 나는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때, 비의존적이고 완전한 존재자, 다시 말해 신에 대한 아주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참이라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자체로 직관되는 것, 자명한 것을 우리는 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그 외에 것은 경계해야 한다. 나의 존재는 무한한 실재성인 신과 완전한 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나는 틀림없이 현존하므로 신과 닮았지만, 나에 대한 직관은 유한성을 포함하므로 신이 아니다. 그런데 신은 실수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없다. 실수나 거짓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미인데, 사실은 틀림없이 실재한다는 의미이므로 실수 혹은 거짓은 실재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무한한 실재성이므로 신에게는 실수하거나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신과 달리 유한한 나는 틀림없이 실수를 할 수 있고 거짓에 속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성을 덜 가지고 있는 한 그것들은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다. 참인 것들은 나의 유한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제 외부세계의 현존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외부 사물들은 나에게 내가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주어진다. 단적인 예로 삼각형을 보자. 삼각형은 외부 세계의 실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관념(마치 유니콘처럼)으로 보아야 하는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는 실재로 보아야 한다. 나는 삼각형을 표상할 때 가장 단순하게 세 변을 가진 도형을 떠올린다. 그러나 삼각형은 이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다시 말해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매우 쉽게 삼각형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삼각형의 관념 속에 피타고라스의 정리, 헤론의 공식, 삼각함수 등등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떠올린 삼각형의 관념은 반드시 이런 내용들을 만족한다. 즉, 우리의 의지에 대항하여 그들은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외부 세계의 현존은 그러므로 신의 현존과 마찬가지로 직관되는 것이다.      


  이상은 데카르트 철학의 요약이었다. 이제 현상학적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겠다. 현상학의 주창자인 에드문트 후설이 말한 바와 같이, 현상학은 신-데카르트주의(Neo-Cartesianism)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의 문제의식과 탐구 방법을 공유하면서도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은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을 정초하는 일이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실한 것을 기반으로 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보니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은 명석하고 판명하게 직관되는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나의 현존, 신의 현존, 세계의 현존이 그것이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먼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꿈과 악령의 가설을 이용해서 외부세계의 현존을 의심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아직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 과정을 현상학에서는 “괄호에 넣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단 자하비가 옳게 지적한 바와 같이, 괄호에 넣는 것은 대상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괄호에 넣는 것은 외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 섣부른 확신이다. 일체의 불합리한 신념을 괄호에 넣는 상태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오직 그것에만, 사태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현상학의 방법론이다.      


  이 시리즈는 꽤 길게 계획되어 있으며 이 글은 가장 기본적인 서론이다. 다음에는 내가 현상학의 두 번째 선구자로 생각하는 앙리 베르크손의 현상학적 측면을 풀어볼 것이다. 내용이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내 지식이 얄팍해서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정말 오래 걸릴 것 같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이 분야에 흥미가 있으니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대학생 연합 문예 창작 동아리 [모두의 일인칭의 시점]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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