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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Dec 20. 2022

장자 철학의 현상학적 재구성

장자 내편을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은 오랜 기간 사상적으로 단절되어 저마다의 관점으로 체계를 구성했다. 그러나 동일한 세계에 대한 상이한 설명의 존재는 우리의 부족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제 세계는 예전과 달리 통합되었으므로 다음 세대의 철학도는 마땅히 상이한 여러 관점들을 고려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말해야 할 책무를 져야 할 것이다. 고정된 경계를 넘어, 왜곡의 위험을 다소 감수할지언정 최선을 다해 새로운 내일을 외치는 일, 그리고 냉철한 시각으로 모든 왜곡을 바로잡는 일, 두 가지 작업 모두가 철학도에게 남겨진 과업이다. 이하에서 나는 인식론의 관점에서 서구 지성사 일련의 흐름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장자의 철학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장자에서 드러나는 사상적 도전이 현대 서양철학의 한 사조를 형성하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동서양 사상의 가장 주요한 차이점은 본성에 대한 관점이다. 세계 속에 대상은 상황마다 변하기 마련이다. 서양의 지성사는 변화하는 대상들을 취합하여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했다. 한 편으로 그것은 ‘이데아’였으며 또 한 편으로는 ‘유’이기도 했다. 반면 동양의 지성사 속에서 이런 사유는 낯설다. 세계 속에 대상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절대적인 극단을 굳이 상정하지 않았다. 대상의 특성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서양인에게 유는 분할 후에 조합된 것이고, 조합이 깨진 후에도 그 유적 속성에 변화가 없다. 유는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동양의 사상에서는 “유는 관계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차이는 그대로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진다. 서양의 시각에서 보자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상의 나타남 자체이다.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건들, 곧 현상은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현상 이면에는 변하지 않는 본성이 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본성이 어떻게 변화하는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대로 플라톤이 주장한 세계의 세 원인에 대응한다. 변하지 않는 본질(eidos), 무어라 규정되지 않는 질료(apeiron),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맺음(poioun)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여러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다르게 주장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구 형이상학의 골자는 이것이다.     


  반면에 동양은 다르다.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현상의 원인이 문제시되지 않는다. 애초에 세계는 무한한 변화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자연의 변화를 따라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는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릴 따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살아서 변화하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알겠는가? 변화하지 않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한 뒤를 알 수 있겠는가?” 현상의 원인이 의문시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것이다. 세계는 변화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어떻게 대상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약간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하는 세계에 경계를 긋는 것은 나의 편의를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대상이 대상인 이유는 내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완벽한 해결은 아닐지 모르지만 일단 넘어가자.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세계 전체가 변화하는 것으로서, 규정되지 않는 것으로서 주어진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세계를 체험하는 나”라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세계와 나의 격절을 포함한다. 세계 전체가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환원된다면 세계 속의 나의 존재 역시 그럴 것이며, 그렇다면 나의 존재 역시 규정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를 체험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세계 전체와 인식론적 거리를 유지하며 ‘세계가 아닌 것’으로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내가 보기에 장자는 이를 잘못 제기된 문제라고 생각할 것 같다. 논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과연 세계를 체험하는 나는 세계와 반드시 격절되어야 하는가? 모든 나타남은 반드시 거리 저편에서 나타나는가? 장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장자에게 있어 세계의 나타남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장자 제 4편 6절에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듣는 것으로 그치고 마음은 받아들일 뿐이다. 기는 텅 비어서 사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도는 텅 빈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마음의 재계이다.” 귀를 통한 들음은 분명 감각일 것이다. 심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마도 이성적 추론에 부합할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면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무엇일까?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통해 이 방법을 장자가 가장 중요하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을 통한 판단, 그리고 이성적 추론을 통한 판단까지 포기한 끝에 우리에게 남겨지는 인식 질료들일 터이다. 그러나 이 질료들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 장자가 말하는 기의 개념이 규명될 필요가 있다. 


  위의 인용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마음을 텅 비게 하여 사물을 기다리는 것이며, 이는 곧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즉 기를 통한 앎은 결국 도와 상통한다. 장자 제 6편의 7절에서, 도는 “하는 일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은 전할 수는 있으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얻을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도는 일반적인 대상들처럼 작용하거나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를 통해 전달되는 무엇이다. 그러니 도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알면 우리는 기를 통한 인지방식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 6편 8절에는 남백자규와 여우라는 두 인물의 대화가 등장한다. 여우는 도를 가르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사흘 뒤에는 천하를, 이레 뒤에는 만물을, 아흐레 뒤에는 삶을 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이 열린 뒤에는 유일한 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다. 천하 만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는 모두 인식의 대상으로서 격절된 것들, 달리 말해 거리 속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모두 잊은 뒤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은 나는 무엇일까? 이는 모순이 아니냐는 것이 내가 처음에 제기한 의문이었다. 장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장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잊힌 나’와 ‘깨달음을 얻은 나’가 동일하지 않아야 한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도를 지킴으로서 망각된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나의 존재가 나타난다. 이 때 나타나는 나는 세계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세계 밖에 있다. 왜냐하면 세계가 일상적인 나보다 이전에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지가 바로 도를 깨닫는 경지이며, 이를 보임으로서 도가 전달된다. 나아가 기는 도와 상통함을 보였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작은 결론을 짓고자 한다. ‘기’는 거리 없이, 세계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주체성이다.      


  보건대, 장자는 서구 인식론의 기본적인 구도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안에 있으면서 세계와 격절된 나의 존재가 인식론의 기본요소였다. 그러나 이제 장자는 무위(無爲)함을 통해 세계 전체와 그 안의 나의 존재까지도 망각함으로서 전체로서의 나를 드러낸다. 이 상황에서 나의 주체성은 거대한 세계 속에서 한 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전체를 품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전회 이후에, 나는 더 이상 세계의 무한한 변화에 항거하여 한 토막의 불변성을 지켜내는 투사가 아니다. 이제 나는 세계 전체, 스스로 무한한 변화 그 자체가 된 성인(聖人)이요 군자(君子)이며 진인(眞人)이다. 장자 제 2편 15절에는 성인과 범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인은 일을 설명하기만 했지 일의 성격을 분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석해야 할 것에 대하여 분석하지 않은 것이 있고, 분별해야 할 것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성인들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나, 범인들은 모든 일을 분별함으로써 자기를 내세우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도는 세계 전체를 자신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상위의 류를 가질 수 없으므로 정의할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이 도덕경 제 1장,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무언가를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무엇이라 규정되기 이전에 이미 체험되는 것이며, 그 체험으로 더할 나위 없이 명증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불필요하다. 이러한 규정할 수 없는 명증성, 달리 말하자면 애매한 명증성으로서 기는 각자에게 나타난다.      


  지나치게 거창하게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생각보다 일상적이다. 다만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성적 추론의 결과로 왜곡할 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무 근거 없이 오늘 비가 올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한 예감의 옳고 그름은 우선 차치하자. 대체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가? 그런 생각은 지금 당장 감각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비는 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성적인 추론을 통한 예측 또한 아니다. 오늘 비가 올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런 근거가 있었다면, 이를테면 기상청 예보를 보았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비가 올 것 같아”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따가 비가 온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지는 것은 막연한 느낌, 그렇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껴져서 순간 말을 뱉어버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찝찝한 느낌이다. 바로 이 애매한 명증성의 모습으로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작용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물과 물고기 사이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에게 물은 체험되는 것이지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道) 역시 체험되는 것이지 인식되는 것이 아니며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거리 없는 나타남, 달리 말하자면 체험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직 의문이 남는다. 기를 통한 인지방식이 이토록 명증하며 일상적인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신뢰하지 못하는가?     


  장자 5편 8절이 적절한 단초를 제공할 것 같다. 혜자와 장자의 대화에서, 장자는 본디 사람이란 무정하며, 이 때 무정하다는 것은 좋고 싫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며 자기 삶에 이익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정이라 함은 호오(好惡)로 스스로를 상하게 하며 자기 삶에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인의 삶이, 달리 말하자면 도(道)가 아니다. 즉, 사람은 본래 무정하여 도를 따르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자기 삶에 이익을 찾고 호오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하며 도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를 통한 인지방식을 신뢰하지 못하고, 또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호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한 기를 통한 인지방식은 그만큼 덜 명증할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되어야 하며 우리는 세계를 내 안에 품지 못한 채 실낱같은 실존을 지키고자 세계와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이 장자에서 드러나는 사상적 도전의 요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서론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흐름은 철저하게 현상학적이다. 혹은 적어도, 현상학적 견지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장자는 무위(無爲)를 통해서 세계를, 나아가 삶을 괄호 안에 넣는다. 무위는 장자의 입으로 풀어낸 현상학적 괄호 넣기로 볼 수 있다. 그 끝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토대가 있다. 감각과 이성적 추론까지도 무위한 끝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氣)이며, 이것은 장자의 시각에서 재해석된 현상학적 코기토(cogito)에 상응한다. 물론, 장자의 기는 후설의 코기토와는 다르다. 후설의 코기토는 여전히 거리 속에서 외부 세계를 지향하는 구성적 주체였다. 반면에 장자의 기는 의식의 지향성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이러한 지향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이다. “지향하는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기는 함께한다. 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의식은 부재하다고 말해야 한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장자와 현상학의 주창자인 후설의 차이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 미처 완료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후설의 상황은 그가 사유와 사유된 것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 본질적인 것이다.” 오히려 장자는 또 다른 현상학자인 미셸 앙리와 더 유사한 것 같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현상학적 일원론”이라고 비판한다. 서구 철학사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편견, 곧 ‘존재는 나타나는 것이며, 나타남은 오직 거리 속에서만 가능하다’라는 것이 바로 현상학적 일원론이다. 앙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후설이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필증적 공리’로서, 그로부터 세계를 연역하기 위해 세계 속에 남겨진 세계의 한 조각이 아니라, 모든 가시적인 세계가 환원되고, 가시적 세계의 기반인 ‘봄’ 자체마저 부정된 순간에,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으로 주어지는 무엇”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끝에 얻게 되는 것, 달리 말해 코기토는 더 이상 단순한 지각이나 표상작용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지각이나 표상작용과 같은 ‘탈자적 봄’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자 본질로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으로 주어지는, 자신 이외의 더 이상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 무엇을 더 이상 자신 안에 허용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내재성이다.” 이는 마치 호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을 멈추고 마음을 텅 비웠을 때 성인이 마주하는 도(道)와 그것을 따르는 기(氣)가 세계 전체까지도 자신 안에 포용하는 내재성인 것과 같다. 보건대, 미셸 앙리에 의해 근본적으로 재검토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모든 탈자적 인식작용, 거리 속의 나타남을 괄호 안에 넣은 끝에 마주하는 인식의 기반인 것과 같이, 장자의 기를 통한 인지방식 역시 일체의 심적 작용을 버리고 마음을 허정하게 한 끝에 마주하는 도(道)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장자의 철학은 현상학적 견지에서 재구성될 수 있음이 드러난 것 같다. 장자의 무위(無爲)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탈자적 인식작용을 포기한다는 의미의 현상학적 괄호 넣기로 이해될 수 있었고, 기(氣)와 도(道)는 무위의 과정을 통해 마주하는 현상학적 코기토에 상응하는 것 같다. 이런 이해가 매우 위험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장자는 결코 현상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없다. 장자의 현상학적 측면은 장자라는 텍스트가 가진 심원한 깊이로부터 일부를 취한 것일 뿐이며, 그래서 본고는 장자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는 충분히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제자는 완벽한 텍스트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초청받은 자이다. 텍스트가 완벽한 이유는 그 안에 모든 사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사유되기 때문이다. 제자는 텍스트가 가진 의미의 무한한 복잡성 속에서, 이전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제시하여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듦으로써 완전한 텍스트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류의 긴 역사를 뛰어넘어 무수한 스승을 만나 제자가 된 우리는 의당 이러한 책무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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