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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Jan 13. 2023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분석 심리학 정리

   먼저 ‘나’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나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내가 아는 나의 모습과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그것이다.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은 의식화된 부분으로서, 흔히 자아(Ich, ego)라고 부른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은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부터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시작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무의식은 자아의 찌꺼기이다. 부정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나의 모습들이 무의식에 억압된다. 반면에 융에게 무의식은 창조성의 원천이다. 융의 관점에서는, 자아가 정립되기 이전의 신생아의 경우 무의식밖에 없다. (이게 우리가 신생아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무의식으로부터 자아가 탄생한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 (리비도)를 어떻게 승화할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융에게는 무의식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의식화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 그리고 의식화된 부분이 자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다. 확장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모든 무의식을 포괄하게 된다면 자아는 자기(selbst)가 된다. 이를 자기실현이라 한다. 자기는 나의 정신의 총체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불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목표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 융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자아의 면면을 살펴보자.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페르소나이다. 이는 말하자면 대인관계에서 착용하는 가면과 같은 것이다. 대충 뭘 말하는지 다들 감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많이들 고민할 문제는 이 과면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일 것이다. 가면은 거짓된 것이니 집어치워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페르소나 역시 나의 한 모습이다. 또 사회화를 위해 페르소나는 필수적이다. 문제는 페르소나를 자아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의식의 가장 표층에 있는 페르소나로 자아를 채워버리면 자아는 확장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단절된다.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여러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빵점동맹’이라는 웹툰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남자 주인공의 형이 자살을 했다. 수능을 망쳤단다. 그 때 형의 수능 총점이 390점이었나. 매우 높은 점수지만 형이 세상에 살아있기에는 부족한 점수였다. 이 형은 그동안 계속해서 가족들, 그리고 사회의 기대 속에서 살아왔으며 자연히 ‘우등생’이라는 페르소나에 자아를 가둬버렸다. 그러면 억압된 무의식은 파괴적인 결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시야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파괴적인 힘은 무의식의 본성이 아니라 무의식을 과도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물이 많이 모이면 제방이 무너진다고 해서 물이 파괴적인 속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억압된 무의식. 이것이 그 유명한 그림자이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구도 그림자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의식화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상당히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림자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림자에 휘둘려서 살게 된다. 살다 보면 가끔 만나게 되는 이유 없이 싫은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많은 경우 그들이 가진 부정적인 모습들은 나의 그림자이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그림자를 투사하고, 나의 자아는 나의 내면에서 그것들을 억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그림자의 투사 대상들을 미워한다. 이런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 부모와 자녀는 그토록 자주 반목하는가? 부모는 어린 아이에게 세계 전체이다. 아이는 자연히 부모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심지어는 그림자까지도 말이다. 자녀의 그림자는 곧 부모의 그림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하며 반목하게 된다. 잠시 다툼을 멈추고 돌이켜보면 사실 부모와 내가 닮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부모와 닮은 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더욱 싫어하게 되고 또 이런 모습을 물려준 부모를 원망한다면 이는 그림자를 더욱 억압하는 일이다. 억압된 그림자는 더욱 강력해진다. 나는 계속해서 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이고 그러면서도 계속 부모로부터 나쁜 모습만을 찾아낼 것이며 가정 내 불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래, 사실 내 얘기다.      


  그림자를 의식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림자를 알아야 한다. 그림자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꿈의 해석이기는 한데, 이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니 패스. 괜히 좆문가에게 상담을 받았다가는 외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러니까 나한테 꿈 들고 찾아오지 마시길.)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도 짤막하게 말했던 것처럼,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유 없이 좋은 사람도 필요하다. 아무 이유 없이 좋거나 싫은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결핍된 부분이거나 내가 무의식에 억압한 모습들이다. 나는 어릴 때 누나랑 많이 싸웠는데, 누나의 불합리한 감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누나는 자주 기분 나빠했고, 나는 도대체 왜 기분이 나쁜지 물었다. 그러면 누나는 그런 데 이유가 어디 있냐고 물었고 나는 그런 감정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대답했다. 그 쯤 되면 누나는 “닥치고 밥이나 쳐먹어”로 응수했다. 이런 일은 아직도 계속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진심이었고 요즘에는 장난이라는 점이다. (누나를 놀려먹는 건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논리적인 사고가 너무나도 의식화된 나머지 감정적인 부분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적인 부분을 무의식에 억압한 것처럼 누나의 감정을 배척했다. 그러나 억압된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방법을 찾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시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의식에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는 건강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또 한 편, 이따금 나는 별 것도 아닌 일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서 싸우곤 했다. 이건 무의식과 의식이 전도될 때 흔히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인데, 조금 진정되고 나면 그렇게 화를 냈던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다들 이런 일이 한 번씩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때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조심해야 한다. 이 순간 느껴지는 자기혐오는 제 자리를 되찾은 의식이 무의식을 다시 억압하는 과정이다. 그냥 이렇게 억압하고 사건을 마무리한다면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런 순간이 나의 그림자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내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잘 생각해보자. 그러면 내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를 대할 때에는 “이건 잘못된 게 아니야”라는 생각을 일관적으로 취해야 한다. 물론 나는 이런 모습이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잘못된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좋을 수도 있다. 그런 모습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내 경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확하게 분석해가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편견들을 버릴 수 있었고 마침내는 적절한 상황에 그런 모습을 수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과정이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 사람마다 조금씩 방법이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논리적 사고가 의식의 중심을 차지하는지라 분석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한다. 그러나 감정이란 게 결국에는 논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며 그런 부분을 위한 자리도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수양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만약 당신이 감정적이라면 반대로 하면 될 것이다. 당신은 논리적 사고를 무의식 속에 억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런 사고를 연습해보는 것이 꽤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수학 공부를 추천하고 싶은데 허들이 너무 높을 테니, 뭐 철학도 좋지 않을까? 철학도 허들이 너무 높다면 비문학 계열 책들을 추천한다. 여튼 중요한 것은, 내 무의식에 억압된 부분들이 의식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뭔가 mbti 비슷하다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맞다. 사실 mbti는 융의 분석심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성격유형분류체계이다. 그런데 요즘 이 체계가 사용되는 양상을 보면 기가 차다. 거의 사주 풀이하듯 mbti를 본다. 오마이걸 유아가 한 방송에서 “그런 걸로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해봤다.”라고 하던데, 요즈음의 사용행태를 보면 지극히 현명한 생각이다. 이 분류체계의 목적은 나의 자아,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속성들을 파악하고 무의식에 억압된 대극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의 그림자를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지 나 혹은 타인을 규정하고 궁합이나 보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림자는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물론 mbti처럼 일반적인 양상을 보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그림자는 각자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무의식의 어떤 부분은 천부적이다. 태생적으로, 보다 정확히는 성별에 따라 결정되는 무의식의 부분도 있다. 일전에 사랑 글쓰기에서 썼던 아니마/아니무스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조금 감이 왔을 수도 있는데, 융의 분석심리학의 기본테제는 대극 합일이다. 대립되는 극단들을 융합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인데 이는 융이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영향도 있다. 이런 사상에서 볼 때, 남성과 여성의 대립되는 두 항 역시 합일을 이뤄야 한다. 그러니 남성의 무의식 속에는 여성이, 여성의 무의식 속에는 남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각각 아니마/아니무스라고 한다.      


  보다 깊이 들어가기에 앞서 융의 관점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서구 지성사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융 역시 남성성을 분석적, 여성성을 관계적이라고 보았다. (왜 서구 지성사에서 이렇게 보았는지는 후에 페미니즘에 대한 글에서 상술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노자의 설명이 매우 재밌는데, 노자는 암컷과 수컷의 성기 모양으로부터 이런 특성이 유래한다고 말한다. 수컷 성기는 돌출되어 있으므로 산, 있음, 경계와 연관된다. 반면에 암컷 성기는 비어 있으므로 골짜기, 무, 섞임과 연관된다. 융과 노자 모두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암컷과 수컷의 차이는 다름을 의미할 뿐, 둘 중 무엇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둘 모두 필요하며 중요한 것은 둘의 합일이다.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유무쌍생(有無雙生, 유와 무가 더불어 산다.)이라고 말한다. 융의 경우에는 남성 속에 여성성(아니마), 그리고 여성 속에 남성성(아니무스)을 위치시킴으로써 노자와 유사한 생각을 보여준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굳이 따로 논의한 이유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아니마를 대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반면에 여성의 경우 자신의 아니무스를 대할 때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남성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는 관계지향적이기 때문에 이성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 그대로 다시 억압되어 버린다. 반면에 남성 속의 여성성인 아니무스의 경우는 강력한 의견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의견은 무의식에서 발원하므로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비논리적이지만 어딘가 그럴듯한 강력한 신념의 형태로 아니무스는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매우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들리는 말로 “남자는 여자한테 말로 안 돼”라는 말이 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많이 적용되는 이 말은 어떤 의미로는 옳은 말이다.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을 보다 쉽게 꺼내놓고는 한다. 남편은 아니마 상을, 아내는 아니무스 상을 꺼내놓는 것이다. 아내의 강력한 의견인 아니무스는 남편의 감정적인 아니마에게 매우 쉽게 상처를 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남편들은 싸움을 피해 도망간다. 그런데 더 재밌는 점은, 일전에 사랑 글쓰기에서도 말했지만 부부는 흔히 상대방에게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 상을 투사한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아니마와 일치하기를 원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집안에서 마주하는 것은 아내의 아니무스 상이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아니무스 상처럼 강단이 있고 모든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기를 원하지만 또 막상 마주하는 것은 남편의 아니마 상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마침내는 체념한다. 그리고 쌓인 불만을 자녀들에게 전가한다. “네 엄마는 성격이 드세서...” 내지는 “네 아빠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알고 보면...” 이런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말들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그림자를 습득한다. 아주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약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고착화하는 이런 발언은 성 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외부 환경을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대한 경험은 언제나 내 신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연히 신체적 차이는 내 의식의 차이에 반영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그들의 의식에 반영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게다가 또 첨언하자면, 아니마와 아니무스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도 그럴게, 남성에게도 아니무스가, 여성에게도 아니마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의아할 것이다. 여태까지 아니마는 남성 속의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성이지 않았는가. 옳다. 그런데 이따금, 자아가 아니마/아니무스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적당한 정도의 사로잡힘은 무의식의 창조성을 전달하여 예술적 영감을 줄 수도 있지만, 과도하면 문제가 된다. 남성이 아니마, 즉 자신의 여성성과 합치되는 일이 극단적이면 그는 자신을 여성처럼 생각하게 된다. 여성의 경우도 아니무스와 강하게 일치되면 자신을 남성이라 생각하게 된다. 본래 무의식에 위치했어야 할 아니마/아니무스가 자아와 합치되며 의식의 표면으로 나오게 되면서 본래 의식에 위치했어야 할 남성성/여성성이 무의식에 억압된다. 이 경우 인격의 해리가 나타날 수 있으며 심해지면 동성애적 양태를 보이게 된다.      


  이렇듯 생물학적 남성이나 여성은 무의식의 아니마, 아니무스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런데 거듭 반복하듯이 아니마/아니무스는 무의식의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는 아니마에 사로잡힌 남성의 모습을 아니무스로 가지는 여성이나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모습을 아니마로 갖는 남성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니무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남성이나 아니마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남성의 아니마, 여성의 아니무스가 맞다.  


  그러면 아니마/아니무스는 이런 부정적인 효과만을 나타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보다 깊은 무의식으로 내려가기 위한 통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니마, 아니무스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무의식의 이성성을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보다 자기실현의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      


  이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구성하는 원형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파트가 공부할 때 가장 재밌었다. 원형이라 함은 인류가 오랜 세월동안 존속하면서 무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갖게 된 일련의 이미지들이다. 이것들은 무의식의 강력한 에너지의 어떤 측면을 상징한다. 분석심리학에서 민담이나 신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먼 옛날부터 구전되는 이야기들 중 다수가 바로 이런 심리적 원형들을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남성을 구성하는 원형상들을 살펴보자. 당연하지만, 남성을 이루는 원형상들은 고스란히 여성의 아니무스를 이루는 원형상들이다.      


  학자마다 다르고 더욱 세분할 수도 있지만 다음의 네 가지가 남성성을 구성하는 원형상들로 제시된다. (당연히 완벽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의 오독을 감수하면서도 편의를 위해 구분하는 것이다.) 바로 왕, 전사, 마법사, 연인의 원형상들이다. (이는 로버트 무어의 분류이다.) 각 상들은 적고 많음의 두 극단과 이상적인 중도의 세 가지 상태를 가질 수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왕 원형은 결단력과 지도력을 상징한다. 과할 경우 독선적이며 적을 경우 소극적이다. 전사 원형은 대담함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과할 경우 폭력적이며 적을 경우 우유부단하며 회피형의 모습을 보인다. 마법사 원형은 지혜의 상징이다. 과할 경우 허영이 심한 경우가 많고, 적을 경우 무식하다. 연인 원형은 관계성을 상징한다. 과하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꽃밭에 산다. 적을 경우 무미건조하다. 네 가지 원형이 모두 긍정적인 합일을 이루면 이것이 영웅의 원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재물은 세속적이라고 경시하면서 앞에 나서기는 싫어하는 남성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의 경우 마법사 원형과 연인 원형에 매우 강하게 사로잡혀 있으면서 전사와 왕 원형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러니 앞으로 의도적으로 앞에 나서는 활동을 하고 대인관계를 넓혀볼 필요가 있겠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좆문가이면서도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상했겠지만 내 얘기라서 그렇다. 이것이 로버트 무어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내렸던 진단이었다.      

  다음은 여성성을 구성하는 원형들을 말해보자. 여성성의 구성은 다음의 네 가지, 어머니, 여전사, 영매, 반려자로 나눌 수 있다. (이는 토니 볼프의 분류이다.) 어머니 원형상은 성장시키는 힘의 상징이다. 과하면 과도한 간섭으로 오히려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적으면 약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전사 원형은 독립성의 상징이다. 과하면 자신 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와 투쟁하려 한다. 적으면 자립적이지 못하고 의존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매 원형은 융합하는 힘의 상징이다. 이 원형은 무의식의 힘을 파악하고 그것을 드러낸다. 특히 집단적 무의식이나 시대적 분위기를 읽어낸다. 과하면 무의식의 힘을 자꾸 드러내거나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적으면 눈치가 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반려자 원형은 유혹하는 힘의 상징이다. 보통 개인적인 무의식을 자극한다. 과하면 사회적인 페르소나를 무시하고 현실감각을 상실할 수 있다. 부족하면 영감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때 고려하면 좋은 것이 융의 대극 사상이다. 한 쪽의 과잉은 다른 쪽의 결핍이기도 하다. 지배하고 규율을 세우는 왕은 경계를 허무는 연인과 대극을 이룬다. 또 앞장서서 결단하는 전사는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는 마법사와 대극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페르소나를 성장시키는 어머니는 개인적 무의식을 자극하는 반려자와 대극을 이루고 사회적 권위에 도전하는 여전사는 집단적 무의식을 읽어내는 영매와 대극을 이룬다.      


  지금까지 논의의 총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족을 생각해보자. 단란한 4인 가족이다. 먼저 아버지를 살펴보자. 꽤 괜찮은 중견 기업의 부장으로 외벌이 중이다. 출장이 잦은데 가끔은 없는 출장도 만들어 가곤 한다. 아내와는 말이 안 통한다며 답답해한다. 무엇보다 나한테 빨대 꽂고 사는 주제에 다들 마땅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딸과는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다. 아들 놈은 뭔가 정이 잘 안 간다. 몇 달 전부터 불륜 중인데 상대 여성과는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서 좋다. 다음은 어머니다. 얼마 전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 힘들다. 삶에 의욕이 없다. 이혼할 생각은 없다. 여러모로 이혼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아직 남편을 사랑한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혼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이렇게 힘든 마음을 자식들에게 하소연하는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내 말을 귀찮아하니 더욱 서럽다. 아들은 그나마 좀 의지가 된다. 딱히 뭔가 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든든한 느낌이다. 이제 딸을 살펴보자. 딸은 아버지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어머니를 보면 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자기가 보기에도 어머니가 좀 답답하다. 특히 딸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상처가 많다. 사춘기 가장 힘들었을 때 어머니는 딸의 마음을 위로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강해지라고, 네 감정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했다. 근데 이제 와서 저러니 좀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 편을 들 생각도 없다. 솔직히 이제 잘 모르겠다. 그냥 도망치고 싶다. 최근에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심리적으로 굉장히 의지가 되어준다. 하지만 결혼 생각은 없다. 원래도 없었지만 이런 꼴을 보니 더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결혼하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다. 자 이제 문제 나갑니다. 위 상황을 분석심리학에 기초해서 최대한 명확히 파악하고 올바른 아들의 대처를 서술하시오. 와. 내가 냈지만 디지게 어렵다.      


  아버지를 보자. 가부장제 사회에서 외벌이를 하는 가장의 흔한 모습이다.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를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은 원형은 왕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가정의 규율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시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능력이 있지만 가정에서는 무능하다. 표면적으로는 전사 원형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다. 이는 자신의 아니마를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의 아니마는 아마도 반려자 원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헤라를 두고 다른 여성을 찾는 제우스와 같은 그는, 제우스가 아테나를 아끼듯이 자신의 딸을 아낀다. 그는 자신의 아니마의 반려자 원형에 사로잡혀 불륜을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헤파이스토스를 미워하듯이 자신의 아들을 미워한다. 이런 현상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꽤나 자주 나타난다. 로버트 무어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여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억압하기 위한 사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년의 단계에 멈춰서 미처 성숙하지 못한 남성들이 다른 남성들, 진정한 남성들을 억압하기 위한 사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력하게 가부장적인 남성들은 아들을 바라면서도 두려워한다. 아들은 내 뒤를 이어 이 사회적 규율을 유지해나갈 사람인 동시에 언제 나를 뛰어넘을지 모르는 존재이다. 여러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친살해 장면을 생각해보자. 또 제우스는 아테나가 아들일까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이제는 어머니를 살펴보자. 아마도 어머니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은 어머니 원형인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내면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는, 어느 누구의 내면도 주의깊게 살피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딸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사 원형에도 꽤 큰 영향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이나 무의식의 관계가 아닌, 현실적인 객체들이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언제나 그림자를 갖는다. 유년기의 딸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그녀는 남편의 외도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자 누구보다도 연약해지고 공감을 기대한다. 그녀의 자아를 이루던 여전사와 어머니 원형은 남편의 외도로 무력해졌다. 이제 그녀는 영매와 반려자 원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동안 무의식에 억압해왔던 이 원형들은 미처 분화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매우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주 그녀는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고 욱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딸에게 반려자 원형을 투사하고 싶지만 딸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다. 자아가 손상된 그녀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보호자를 찾는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줄 왕과 전사의 남성상을 찾는다. 그래서 아들을 바라보고, 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여 자신의 남편보다 긍정적인 왕과 전사를 만나기를 기원한다. 그러는 한 편, 본래 자신의 세계를 지켜주던 남편에게 조금 더 기대를 걸어본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이제 딸을 보자. 그녀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합하는 아테나이다. 어머니에게 냉담하고 아버지를 외면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니무스의 왕을 아버지에게 투사하지만, 실제의 아버지와 투사되는 아버지의 괴리로 괴로워한다. 그녀는 새로운 아버지를, 영웅을 찾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마음가짐에서 볼 때 그녀는 영매 원형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아버지가 제정하고 마침내는 집안의 불문율이 되어버린 가부장적 체계를 느낀다. 동시에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까지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사가 아니다. 앞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도망치는 것이다. 문제로부터 회피한다. 그리고 다른 아버지를 찾는다. 아마도 남자친구가 그녀에게는 새로운 아버지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아버지는 기존의 아버지와는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 기존에 가정을 지배하던 왕과 전사의 사회를 벗어나 자신의 심리적 고충을 해결해줄 마법사를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이런 식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제우스의 딸인 아테나는 어머니 메티스를 기억하지 않는다. 아테나는 여신이지만 철저히 남성적이다. 그녀는 결코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딸의 아니무스는 이미 아버지의 그림자가 전이되어 왕과 전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아니무스를 남자친구에게 투사할 것이다. 본래 무의식적 필요에 따라 만난 마법사는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딸은 자신으로부터 어머니의 성질을 모두 배제하고 아니무스에 동화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동화되어 여성성을 거세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그녀는 스스로를 무성애자라 생각할 것이다. 왜 동성애자가 아니라 무성애자냐면, 그녀의 무의식에는 세파와 맞서 싸울 여전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선호하므로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을 택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아들은 어떻게 조언할 수 있을까? 우선 어머니는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당연히 좋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활동을 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어머니 원형 외에 다른 원형, 여전사 원형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 하나는 남편이 만들어놓은 가정의 규율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자신의 감정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는 게 좋겠다. 작가는 언제나 최초의 독자이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무의식과 소통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치료의 효과가 있다. 무의식의 창조성은 자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딸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딸은 어머니가 준비만 된다면 언제든지 영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어머니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지금 상태로서는 딸의 아니무스를 자극할 뿐이다. 딸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해낼수록 딸은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아버지는 답이 없다. 불륜까지 저지르고 있는 데다가 걸리기까지 했으니 걍 가시던 길 가시다 인생 파탄 나시기를 바란다. 딸은 집을 나와 따로 사는 게 좋겠다. 자신의 정신건강도 좋지 않은데 문제의 당사자도 아닌 그녀가 굳이 사태에 휘말려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또 그녀의 자아는 아니무스와 상당한 동일시를 이루고 있으니, 글을 쓰되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정 쓰기 어렵다면 읽는 것도 좋다. 플라톤을 강추한다. 이는 내가 진성 플라톤 빠돌이여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의 발언을 분석하는 플라톤의 저작들은 그녀가 내면의 아니무스를 냉철하게 검토하는 데 있어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딱 여기까지가 분석심리학에 대한 내 지식의 한계인 것 같다. 아니마/아니무스는 무의식의 전체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분석심리학의 목적은 전체정신으로서의 자기와 자아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자기실현이라 한다. 아니마/아니무스와의 소통은 물론 자기실현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닌데 그럼 뭐가 더 있는지는 아직 공부 중이다. 그런데 내 경험상, 여기까지 아는 것으로도 내 삶은 매우 풍요로워졌다. 나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고 조금 덜 싸우게 되었다. 갑자기 욱하는 순간이면 나의 어떤 그림자가 자극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따금 갑자기 우울해지면 무의식과 소통하기 위해 일상을 할애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이 분야를 배우면서 나는 조금 더 건강해졌다. 그러니 이 글의 목적은 영업이다. 여러분 모두 분석심리학 츄라이 츄라이.     


  영업의 목적에 맞게 내가 참고한 도서들을 적어보겠다. 난이도를 고려해서 적었으니 순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제목과 출판사만 적겠다.

1. 융 심리학 입문. 문예출판사

2. 분석심리학 이야기. 집문당

3. 왕 전사 마법사 연인. 파랑북

4. 그림자. 한길사

5.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6.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 또 하나의 문화

7.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또 하나의 문화

8. 창조신화. 한국 융 연구원

9. 분석심리학과 희생제의: 개성화와 문명의 설립자. 달을 긷는 우물     


참고로 8,9는 나도 다는 못 읽었다. 특히 9번은 얇은데 어렵다. 언젠가 재도전..

한길사에서 나온 4,5번을 주로 참고했다. 이부영 선생님의 분석심리학 3부작은 정말 수작이다.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잘 썼으니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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