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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May 09. 2023

소피스트

플라톤의 '소피스트' 요약

감히 생각건대 소피스트 편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물론 이데아와 같은 유명한 사상들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치열하게 사유하는지, 그 과정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대화편에서 그는 소피스트를 명확히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에 대립하는 진정한 철학자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어떤 기술을 무엇으로 분류할 것인지의 예시로 낚시를 든다. 낚시는 우선은 기술이다. 기술은 크게 무엇을 얻어내는 획득술과 만들어내는 제작술로 구분할 수 있다. 획득의 방법은 대상을 자신에게 예속시키거나, 혹은 대상을 다른 것과 교환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예속하는 방법은 사냥하거나 (자연에서 대상을 취득하는 것을 모두 사냥으로 표현한다) 경쟁을 통해 빼앗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사냥은 대상에 따라 살아있는 것을 잡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을 잡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만일 대상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뭍에서 걸어다니는 것과 헤엄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헤엄치는 것이라면 공중에서 헤엄치는 경우(새)와 물에서 헤엄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방법에 따라서 타격하여 사냥할 수도 있고 그물을 칠 수도 있다. 나아가 타격하는 경우에 낚시, 작살, 갈고리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낚시술이란 일단 타격하여 물에서 헤엄치는 살아있는 대상을 사냥하여 예속, 획득하는 기술의 한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분류를 통해 소피스트 기술이 무엇인지 규정해 보자.      


위의 예시로부터, 육지의 살아있는 것을 사냥하는 기술로부터 시작해 보자. 육지 동물은 크게 야생의 상태인지 혹은 길들인 상태인지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인간 역시 길들인 상태의 동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길들인 동물을 사로잡는 방법은 설득하거나 강제하거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설득의 경우 사적인 자리에서 설득할 수도 있고 공적인 영역에서 설득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사적으로 설득하는 경우 설득자는 보수를 받을 수도 있고 선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구애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지만 전자와 명확히 구분되는지는 애매하긴 하다. 뭐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설득하는 기술을 펼쳐서 현금을 보수로 받는다. 따라서 소피스트 기술은 현금을 보수로 받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을 설득함으로써 사냥하여 예속, 획득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소피스트 기술의 전부일까?     


관점에 따라 소피스트 기술을 예속이 아닌 경쟁의 예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은 크게 싸움과 경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싸움은 또한 방식에 따라 말다툼과 폭력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말다툼은 반박하는 경우, 그리고 법정 송사를 진행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반박한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상대방의 말이 옳지 않음을 보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 기술은 이 기준이 만일 옳고 그름에 관하여, 다시 말해 정의에 대하여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쟁론하는 경우에도 돈을 받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소피스트 기술은 돈을 받고 정의에 대해 논박하여 경쟁하는 기술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이제껏은 모두 획득술 중 예속하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교환에 대해서 성립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환에 대해서 역시 동일한 논의를 전개해 보자. 교환은 거래와 선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거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은 영혼과, 어떤 의미로는 지적인 활동과 관계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배울 수 있는 것과 그냥 보여주는 것으로 나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실용적인 기술에 대해 배우는 것일 수도 있고 탁월함에 대해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 기술은 실용적인 기술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무엇이 탁월한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소피스트 기술은 탁월함에 대해 가르쳐주는 거래로서의 교환술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정리하자. 소피스트 기술은 우선 획득술 중 특히 사냥의 일종으로서 현금을 보수로 받는 인간 설득 기술이다. 또한 획득술 중 경쟁의 일종으롯서 돈을 보수로 받으며 정의와 불의에 대해 쟁론하는 싸움기술이다. 동시에 교환의 일종으로서 탁월함에 대해 가르쳐주는 거래 기술이기도 하다. 이런 결론에 대해 재검토 하자.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설득력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이 긴 논의 전부를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왜냐하면 “하나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플라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학문의 방법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버린다. 전혀 아까울 것이 없다. 모든 작업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 길에 참이 부재하다고 생각되면 기쁘게 버린다. 하나의 오류를 검토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면서. 학문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하는가? 알 수 없다고 결론짓고 포기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 오류가 왜 발생했는지 검토한다. 왜 하나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가?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근원적인 기술은 무엇인가? 위의 모든 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기술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분리의 기술이었다. 무엇과 다른 무엇을 구분하는 기술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므로 기술에 대해서 논의한다면, 그 출발은 분리여야 한다.      


그렇다면 분리는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 어떤 분리는 좋은 것에서 나쁜 것을 분리한다. 이를 정화라고 한다. 정화 외의 기술은 비슷한 것과 비슷한 것을 필요에 따라 분리할 뿐이므로 지금의 논의와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선 정화에 집중하자. 정화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대상에 따라 영혼의 정화와 신체의 정화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정화가 나쁜 것을 제하는 것이라면, 영혼의 정화를 살피기 위해서는 영혼에 나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악덕과 무지를 제시한다. 이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은 아니다. 영혼이 악하다는 것은 악한 무엇을 했다는 것인데 (신체의 행위 뿐 아니라 생각 등까지 포함해서 고려하는 중이다.) 만일 알고 했다면 그것은 악덕일 것이며 모르고 했다면 무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정화 역시 무엇을 구분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악덕을 배제하는 방법은 처벌이고 무지를 배제하는 방법은 교육이다. 다시 교육하는 방법은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훈계이고 다른 하나는 논박이다. 훈계는 지위의 고하가 명백한 반면 논박은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의 무지를 배제해 주므로 가장 중요한 정화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소피스트 기술은 논박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자신의 기술로서 무지를 정화해 주는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도 이상의 구분에서 소피스트 기술은 논박술에 가장 근접해 보인다. 그러므로 조금 더 검토해 보자. 소피스트 기술이 논박술이라면, 그들은 무엇을 논박하는가? 바로 모든 것을 논박한다. 그런데 논박이 실제로 가능하고 또한 유효하기 위해서는 논박자가 그것에 대한 지식을 상대방보다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피스트는 모든 것에 대해 반박하며 또 반박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수 있을까? 이로부터 소피스트 기술에 대해 그럴듯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즉, 소피스트 기술은 “모든 것에 관해 가짜 지식을 갖고 그것을 설파하는 기술”이다. 이를 조금 형이상학적인 수사로 표현하자면, “실재가 아닌 모상(mimesis)을 만들고 보여주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피스트는 모방자, 모상 제작자의 일종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 하나가 제기된다. 모방하는 기술은 크게 두 가지로, 닮은꼴을 제작하는 기술이거나 유사 닮은꼴을 제작하는 기술로 나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당시 고대 그리스의 조각술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닮은꼴이라 함은 원본의 비율을 있는 그대로 따라하는 것인 반면, 유사닮음 제작술은 원근법을 고려하여 일부러 원본의 비율을 왜곡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원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답지 않은 관점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원본과 닮아 보이는 경우이다.” 이는 참이 아니지만 참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 다시 말해 거짓의 경우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거짓은 참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참인 것은 사실과 합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참이다. 반대로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있지 않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다. 여기서 매우 굉장한 고대 그리스의 사상적 의문이 제기된다. 있지 않는 것이 정말로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논변은 파르메니데스로 대표되는 엘레아 학파에서 제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논증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대립한다.     


이 두 가지 전제로부터 다음의 모순들이 도출된다.


1. ‘~인 것’은 이미 대상의 존재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모순이다.

2. ‘있지 않은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말해질 수조차 없어야 한다.

3. 있음은 있지 않음과 완전히 대립하므로 섞일 수 없다. 그리고 ‘수’의 개념은 확실히 있음에 속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말하거나 떠올릴 때, 수의 개념은 결코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있지 않은 것’을 떠올린다면, 있지 않은 그것은 반드시 수의 개념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데, 있음은 있지 않음과 섞일 수 없으므로 있지 않은 것은 수의 개념과 섞일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모순이다.

4. 사실은 위의 명제조차 모순이다. ‘~임’이라는 속성이 ‘있지 않은 것’에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소피스트가 정말로 모상 제작자라면, 그리고 모상이 참된 것은 아니지만 참된 것과 닮은 것이고, 참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참되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존재가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있지 않은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의 강력함이 아직 체감되지 않을 여러분을 위해 이 논변을 조금 더 전개해 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나는 대학교 2학년, 아직 철학과를 복수전공하기 전에 형이상학 수업을 청강하다가 이 논증을 처음 접했고, 철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1.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

2.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상호 대립되므로 서로 섞일 수 없다.

3. 있지도 있지 않지도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4. 생성은 있지 않은 것이 있게 되는 것이고, 소멸은 있는 것이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5. 3번으로부터, 4번은 있는 것과 있지 않는 것이 서로 섞이는 예이므로 모순이다.

6. 따라서 생성도 소멸도 있을 수 없다.

7. 운동은 한 지점에서 소멸하고 다른 지점에서 생성되는 과정이다.

8. 6번으로부터 7번도 모순이다. 따라서 운동도 있을 수 없다.

9. 하나가 둘로 나뉘기 위해서는 하나 사이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어 갈라야 한다.

10. 3번으로부터,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1번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있지 않으므로 있는 것을 나눌 수 없다. 

11. 9번과 10번으로부터, 있는 것은 나뉠 수 없다.

12. 따라서 있는 것은 반드시 하나이다.

13. 이상으로부터 존재는 하나이며 운동, 생성, 소멸은 없다.     


잠깐 읽기를 멈추고 이 논증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바란다.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하나임을, 그리고 운동과 생성, 소멸이 없다는 궤변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는 철학자가 아니다. 논증의 첨예함에 매료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사실과 체계가 대립될 때 무너져야 하는 것은 체계이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운동하므로, 이 논증을 어떻게 무너트릴지 생각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나는 처음 이 논증을 접했을 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플라톤의 답변을 살펴보자. 그의 논박은 실로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할 정도이다.      


우선 모든 것이 하나라는 주장을 검토해 보자. 만약 정말로 존재가 하나라면, 동일한 대상에 두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하나가 올바르고 하나는 별명, 거짓이 섞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의 전제 상 있는 것인 참과 없는 것인 거짓은 섞일 수 없으므로 모순이다. 혹은 실제 존재는 존재이고 하나는 다만 이름에 불과하다면, 이미 실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와 이름으로서의 ‘하나’라는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 하나가 아니게 된다. 덧붙여서, 정말로 존재가 하나라면 그것은 존재성(存在性)과 일자성(一者性)을 동시에 갖게 되므로 이미 복수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두 모순이다.     


이런 모순들은 존재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견해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는 유물론적 사고로서, 있는 것은 오직 물체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위의 모순 중 존재성과 일자성의 모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존재는 하나임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존재가 정말로 물체라면 하나임이라는 속성 역시 물체인가? 물체는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게 특징인데, 만일 하나의 대상이 두 가지 속성을 가질 수 있고 두 속성이 모두 물체라면 어떻게 동일한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가? 이로부터 유물론적 사고는 수이 긍정하기 어렵다. 또 하나는 관념론적 사고인데, 참된 존재는 ‘비물질적 형상’ 뿐이며 물체는 운동 중에 있는 어떤 순간적인 생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문제가 있다. 단적인 예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 견해에 따르자면 참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고, 실제 인간은 이 참된 존재로서의 인간과 신체가 어떤 운동(이를테면 영혼)에 의해 결합된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존재는 결코 운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된 존재가 어떤 운동에 의해 신체와 결합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따라서 두 가지 견해 모두 말이 안 된다.      


여기까지 온갖 난점들을 던져 놓았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모든 문제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존재는 정지하고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책 역시 명확하다. 정지와 운동은 모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운동과 정지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인데, 어떻게 둘 다 있음일 수 있는가? 그래서 플라톤은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한다. 있음과 정지와 운동을 구분하는 것이다. 즉, 있음은 본성상 정지도 운동도 아니고 아예 다른 어떤 것이다. 이에 대해 가능한 해석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있음, 운동, 정지는 결코 섞이지 않는다.

2. 있음, 운동, 정지는 늘 섞여서 존재한다.

3. 있음, 운동, 정지는 일부는 섞이고 일부는 섞이지 않는다.     


1번은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운동하는 것’의 존재는 운동과 존재의 혼융을 전제하고 있다. 2번 역시 안 된다. 그것들이 언제나 섞여 있다면 운동과 정지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3번만이 유일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업은 어떤 대상이 무엇과 섞여있고 무엇과 섞여 있지 않은지를 분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類)에 따라 분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변증술(dialektike)이다.      


여기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세 가지 최고의 류들을 찾아냈다. 바로 있음과 정지와 운동이었다. 이후의 논의는 매우 복잡하므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는 게 보기 편할 것 같다.


1. 운동과 정지는 상반되므로 섞일 수 없다.

2. 있음은 둘 모두와 섞일 수 있다.

3. 그러므로 있는 것, 운동하는 것(있음+운동), 정지한 것(있음+정지)은 서로 다른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동일한 것이다.

4. 다름과 동일함(같음) 역시 필요한 개념이지만 이미 찾은 세 가지 최고류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

5. 따라서 다름과 같음 역시 최고류이다.

6. 5개의 최고류들은 서로 구분되므로 다름은 모든 본성을 관통하는 본성이다.

7. 5개의 최고류들은 각자 자신과 같으므로 같음은 모든 본성을 관통하는 본성이다.

8. 6과 7은 모순이 아니라 시각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 최고류 각각은 자신과 같은 것이며 다른 것과 다른 것이다.

9. 따라서 최고류 각자는 다른 것이기도 하고 다른 것이 아니기도 하다.

10. 마찬가지로, 최고류 각자는 있음과 다른 것이므로 있지 않은 것이지만, 있음의 몫을 받으므로 있기는 있는 것이다.

11. 있음 자체는 다른 류들과 ‘다른’ 것이므로 완전한 일자(一者)이다. 

12. 따라서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있지 않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다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필은 지우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연필이 지우개의 대립항은 아니다.)

13. 무엇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아닌 것 역시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14. 즉,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서 있는 것이다.

15. 나아가, 있음 자체는 어디에도 없고, 있지 않음은 모든 것에 자신의 몫을 준다.      


여기까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이 반박되었다. 있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으로서 있는 것일 수 있음이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래의 목적으로, 다시 말해 소피스트가 어떻게 거짓 믿음,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볼 수 있다. 거짓말, 거짓 믿음은, 있지 않음이 말, 그리고 믿음과 섞인 것이므로 과연 그럴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거짓말, 그리고 거짓 믿음은 어떤 형태의 진술이며 반드시 둘 이상의 단어(적어도 주어와 동사)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희랍어의 logos는 애초에 둘 이상의 단어로 이뤄진 진술을 의미한다.) 진술은 필연적으로 무엇에 대한 진술일 수밖에 없고, 진술은 주어와 동사로 구성되므로 모든 진술은 주어에 대한 진술이거나 동사에 대한 진술로 볼 수 있다. 시대적 편견에 근거하여 모든 진술을 주어에 대한 진술로 취급하자. (술어논리체계가 성립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그렇다면 참인 진술은 주어에 속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경우일 것이다. 반대로 거짓인 진술은 주어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속한 것으로 말하거나, 속한 것을 속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 있기는 하지만, 주어에게는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경우이다. 이미 있지 않은 것의 존재 가능성이 논증되었으므로,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거짓 믿음 역시 가능하다. 나아가, 마찬가지로 거짓된 닮음인 유사 닮음 역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진행된 논의로부터 유사 닮음 제작술로서의 소피스트 기술의 존재 가능성 역시 입증되었다.      


이상으로부터 존재 일반에 대해, 그것은 실제 사물 자체이거나 혹은 무언가의 모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희랍식 편견에 기대어, 제작 주체에 따라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신적이면서 사물 자체인 것은 실제 사물들일 것이다. 신적 모상에는 거울에 맺힌 상, 그림자, 꿈 등을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 사물 자체는 건축의 아이디어 등을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 모상에는 실제 제작물, 건축 등이 배당될 것이다. 우리는 소피스트 기술을 추적하고 있으며, 소피스트 기술이 유사 닮음 제작술이라는 것까지는 이미 논증했으므로 네 가지 모상 중 인간적 모상 제작술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소피스트 기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초반의 분리 기술을 다시 적용해 보자. 인간적 모상 제작술은 사물 자체를 그대로 본따는 닮음 제작술과 유사 닮음 제작술로 구분할 수 있다. 유사 닮음 제작술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있다.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 중에는 모사술이 있을 것이다. 모사술은 알면서 흉내내는 것과 모르면서 흉내내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재주꾼이나 행위 예술 등이 포함될 것이며, 이들은 앎에 의존하는 모사술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덕이나 정의에 대해 잘 모르면서 어떻게든 뭔가를 모사해 보려고 애쓰곤 한다. 이것이 후자의 예시, 곧 잘 모르면서 모사하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며 믿음에 의존하는 모사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는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구분해 보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진짜 아는 거라고 착각한다. 이런 경우는 무지의 한 예로서, 단순하고 순진한 믿음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에 스스로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두려운 마음에 아는 체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두려운 믿음에 해당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위장하는 모사자라고 한다. 이들 중 혹자는 공석에서 대중을 상대로 긴 연설을 하는데, 이런 자들을 가리켜 대중선동가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에 사석에서 짧은 말로 상대를 모순에 빠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이다.      


이제 소피스트를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적 모상 중에서도 유사 닮음 제작자로서, 자신을 도구로 삼아 두려운 믿음에 의존하여 위장술을 펼치는 자들, 그 중에서도 사적인 자리에서 짧은 말로 모순에 빠트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까지 소피스트를 규정하기 위한 지리한 논의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 대화편으로부터 소피스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소피스트가 아닌, 철학자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소피스트는 거짓 믿음에 의지하여 위장하는 모사술을 펼친다. 철학자는 앎에 기초하여 무지를 논박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기저의 이 깊은 차이를 밝힘으로써 플라톤은 그럴듯한 억견(doxa),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앎에 도달하는 방법을, 혹은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방법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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