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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Mar 22. 2021

'포스트모던'이라는 지적 허영

보리스 그로이스 - '새로움에 대하여'를 읽고

  철학과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마치 자신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태도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으며 실제로 대다수의 친구들은 유쾌하지만, 타 학과에 비해 철학과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아마도 자신이 가진 지식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때문이리라. 보통 이런 태도는 배움이 깊어질수록 완화되어서, 실제로 교수님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세상에 갇힌 편협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수 없이 집어던지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책장을 넘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동시에 완벽히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이라 하는 것들의 실상이 다 그렇지 않던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난해한 말을 늘어놓지만 막상 알고 나면 모두가 아는 말인 것이 포스트모던의 본질이니, 이해하지 못한 내가 이해했다고 주장한들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예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다른 것들과 달리 예술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데리다를 주로 인용하고 있는데, 데리다의 사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혀 없으므로 데리다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작가는 예술의 변천을 구조주의적으로 서술한다. 사물 전체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구조적 층위를 갖는다. 하나는 문화적 아카이브, 다른 하나는 세속적 공간이다. 세속적이라는 말은 일상적이라는 말로 표현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화적 아카이브에 등재되는 것이 예술이다. 간혹 세속적 공간의 사물이 문화적 아카이브에 등재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 때 이 사물은 일상적이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취급을 받는다. 뒤샹의 작품 ‘샘’이 바로 그런 예이다. 단지 소변기를 뒤집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이 작품은 이제껏 그런 시도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인준을 받고 문화적 아카이브에 등재되었다. 이런 경우를 가치절상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무 일상적 사물이나 잡아서 가치절상을 하면 예술이 될까? 저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밝힌다. 일상적 사물이 지나치게 문화적 아카이브에 등재되면, 다시 말해 특별한 것들이 일상적인 것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문화적 아카이브에 등재된 것들도 세속적 공간으로 내려올 수 있다. 이런 경우가 가치절하이다.


  저자는 이런 논의를 진리의 관습적 속성으로부터 전개한다. 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단지 사회적으로 통용되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글 전체의 맥락을 파악함에 있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예술관에서 새로움이란 마치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듯 지고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내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이후, 불변의 진리가 없듯 지고의 미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전제이다.


  진리는, 올바름은 단순히 사회적 규약에 불과한가? 물론 진리 및 정의의 척도는 시대적 변화를 거쳤다. 한 때 진리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밝혀졌으며, 한 때 옳다고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판결을 받고 있다. 진리에 대한 예로는 과학의 발전이 눈부시다. 정의에 대한 예로는 사회적 정의와 법의 변천이 적절한 예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천사가 과연 진리와 올바름에 대한 회의로 귀결되어도 좋을까.


  토마스 쿤은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하고자 패러다임 이론을 주창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패러다임 이론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과학자는 거의 없다. 이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 이론이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는 반증이다. 실로 그럴 것이, 갈릴레이에 의해 근대물리학이 성립된 이후 과학사 내에서 ‘혁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이라 함은 기존의 정상과학이 부딪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서 기존의 이론을 대체하고 정상과학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을 말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하이젠베르크를 필두로 한 양자역학이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것들은 혁명이 아니었다. 상대론은 뉴턴역학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양자역학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과학사를 살펴봤을 때, 이후에 등장한 이론은 이전의 이론이 설명했던 모든 결과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자신의 근본 뿌리 자체를 이전의 정상과학에 두어야 한다. 과학사의 발전은 대체나 전환이 아니라 확장, 혹은 진보이다. 이런 발전과정은 진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에 강한 반기를 든다. 물론 진리에 대한 생각은 시대를 거치며 달라졌다. 그러나 그 변천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진보였던 것이다. 과학의 무궁한 발전에 대한 기대로부터 태동한 것이 근대라 할 때, 과학은 여전히 진보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는 끝나지 않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때 이른 설레발에 불과하다.


  정의에 대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행위인가에 대한 기준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변해왔다. 그러나 그 변화는 대부분 더 나은 방향을 향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스티븐 핑커의 작품이 중요하다. 그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작품에서 인류의 폭력성이 어떻게 감소해왔는지를 연구했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과거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 연구결과를 보면 현대의 살인율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다. 심지어는 1,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1900년대와 중세시대를 비교해도, 인구 10만명당 살인율은 중세시대가 훨씬 높다. 사실 구체적 데이터가 없더라도 이런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과거 모든 사회 속에 존재했던 노예제도가 현대에는 감쪽같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이런 결과들로부터 미루어볼 때, 정의의 기준이 변해왔다고 해서 정의라는 것이 단순한 사회적 규약에 불과할 뿐, 진정한 올바름은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진정한 올바름이 없다면, 왜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의 폭력성을 점차 억제해왔단 말인가? 그것이 끝내 성취할 수 없는 목적일지언정, 우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류의 무궁한 발전에 대한 신뢰로부터 태동한 것이 근대라 할 때, 근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은 때 이른 설레발에 불과하다.


  지금까지의 비판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전제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두 번째 비판은 예술론에 대한 것이다. 어쭙잖은 철학서들이 으레 그렇듯이 저자는 자신의 체계를 먼저 세워놓고 그 체계에 걸맞은 사례들만을 인용하고 있다. 뒤샹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활용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리라. 애초에 이 작품 자체가 뒤샹의 작품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일상성과 문화적 아카이브라는 이중적 구도를 먼저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뒤샹의 작품이 일상적 사물을 활용했기 때문에. 그러나 뒤샹 이전의 전체 역사를 보자. 단 한 번이라도 일상적 사물이 예술품으로 가치절상의 과정을 겪은 이력이 있던가? 단적인 예로 클림트를 보자. 그가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것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훌륭한 예술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례는 그로이스가 말하는 가치절상의 구도를 완벽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클림트의 작품은 단지 예술적이지 않았을 뿐, 일상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없이 새로웠고 그래서 부정을 당한 것이지,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뒤샹의 작품은 바로 이 측면에서 독특하다. 뒤샹 이전의 작품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웠고 그래서 배척받았지만, 뒤샹의 작품은 지나치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예술의 긴 역사 속에서 뒤샹이 최초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밝히자면, 예술의 긴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 구조적인 예외를 굳이 예술로 인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너무나도 읽기 힘든 글이었다. 플라톤의 국가가 이 책보다 세 배는 두꺼울 테지만, 차라리 나는 국가를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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