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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10. 2022

달빛 거미집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멀리 지는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결국 사라지기 때문 아닐까."




누군가 식탁 밑에서 테이블보를 끌어당기듯 창턱을 넘어가는 빛의 끝을 보았다. 나는 그 빛의 마지막 모퉁이에 잉크 방울처럼 스며들어 같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터로 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저녁 무렵의 아파트가 무척 고요하다. 이처럼 정숙한 부엌에서 창문을 열고 어두워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게 좋다. 어느 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지 카레 냄새가 나는 저녁이었다. 문득 가곡이 듣고 싶었다. 건너편 집에서 누군가 독일 가곡 한 곡을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보드카 한 잔을 따르고 부엌에 접는 의자를 가져와 앉을 것만 같은 저녁이었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머무는 건 내게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준다. 특별한 계획 없이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이 나의 여행이다 보니 일정 없는 일상 안에서도 가벼운 루틴이 생긴다. 그 루틴이라는 건 보통의 일정과는 달라서 반복될수록 나를 기쁘게 하고 원하면 언제나 변경할 수 있다. 내일은 어디를 가야지, 무엇을 먹어야지, 무엇을 사야지 라는 계획 대신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처음 보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런 소소한 반복이 나의 여행 루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별다른 일정 없는 하루를 보내고 또 비슷한 내일을 맞이하는 날들이 나를 안심하게 해 준다. 나는 그런 날들 사이에 책갈피처럼 생각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은 페르 라세즈에 다녀와서 그런지 조금 피곤했다. 조금 독한 술을 한 잔 마시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동상처럼 꼼짝도 않고 해가 지는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오늘 본,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페르 라세즈는 꽤 큰 묘지이기 때문에 갈 때마다 새로운 예술가의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그건 아마 내가 의도적으로 누군가의 묘지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고요한 묘지를 거닐다가 우연히 눈길이 간 곳에 아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때 난 그 사람과 그 시대와 이 파리라는 도시의 예술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곤 한다.

페르 라세즈를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은 프랑스인이 아닌데도 그곳에 묻힌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만큼 파리가 예술가들이 묻히고 싶은 도시라는 것일까. 지구별 어디선가 예술가로서 반짝이다가 마지막에는 파리로 가서 사라지는 것. 그건 생전에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파리에 묻히고 싶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파리에서 찬란하게 빛나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파리에 묻히고 싶었던 걸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이미 많은 예술가들의 비석으로 채워진 페르 라세즈에 묻히는 건 자신의 작품으로 어떤 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페르 라세즈는 그렇게 눈부시게 빛나다 사라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나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진다, 사라진다, 흩어진다 등의 단어들을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한다. 보통은 떠오른다, 피어난다, 생긴다. 채워진다 등의 단어를 긍정적으로 느끼고 그 반대는 부정적으로 보는데, 나는 그런 인식이 안타깝다. 왜 뭔가 더 가져야만, 더 높이 올라야만, 보다 채워지는 것에서만 행복감을 느끼는 걸까. 사라지는 것과 깊은 여백과 아득히 지는 것들이 나는 아름답다. 멀리 지는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결국 사라지기 때문 아닐까. 사라지지 않는 노을은 아름답지 않다. 나도 노을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아직 타오르지도 사라지지도 못한 나는 과연 성냥불처럼 잠깐이라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나는 부엌에 앉아 오늘 본 묘비 중에서 짐 모리슨의 이름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왜 이곳에 묻히게 된 걸까. 그러다 문득 이 집에 오래된 레코드판이 있던 게 기억났다. 나는 거실에 가서 그녀의 엘피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블라디미르 아스키나지, 카라얀 등 어릴 때 집에 있던 아버지의 컬렉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떤 집에 있는 책이나 음반에서 그 집주인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난 아마도 이 집의 주인인 안니도 작가인만큼 페르 라세즈에 종종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서 집필을 하는 그녀를 상상했다. 마레의 뒷골목, 많은 책, 낮은 조도의 조명, 오래된 클래식 음반들 그리고 고요한 아침과 저녁 시간의 공기가 흐르는 이 아파트가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들 같았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창밖은 이미 밤의 첫 장을 열고 있었다. 달이 떴고 골목길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그때 창문에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실처럼 보이던 그것은 가까이 가서 보니 거미줄이었다. 집을 짓다 말고 떠난 걸까. 거미는 보이지 않고 거미줄만 창틀에 걸려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거미줄이 달빛 때문인지 건너편 건물의 불빛 때문인지 반짝거렸다. 고개를 돌리면 사라지고 다시 고개를 돌리면 반짝거리는 그 거미줄이 마치 달빛으로 직조한 실 같았다. 저 거미줄이 달빛으로 지은 게 맞다면 날이 밝으면 사라져 버릴까. 한 밤에 황홀하게 반짝이다가 새벽이 오면 희미해지고 결국 사라지는 거미줄. 난 그 달빛 거미줄이 예술가의 생애 같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사방이 고요했다. 먼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새벽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가에는 술잔이 놓여있고 난 의자에 앉아 있다. 부엌에서 술을 마시다 잠이 든 것이다. 새벽 공기가 추워서 창문을 닫는데 거미줄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라져 버린 걸까. 왠지 페르 라세즈에 다시 가면 어딘가 달빛 거미줄이 달려있을 것만 같았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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