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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29. 2022

완벽한 사라짐에 대하여

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어쩌면 신은 인간에게만큼은 완벽한 삭제 버튼을 부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불가능할까.'

나는 다리 중간에 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가 곧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리 위에 서있다고 해서 그가 뛰어내리려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가 점점 희미해지다가 빛이 흩어지듯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날의 산책은 온통 사라짐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걷다 보면 너무 깊은 생각에 잠겨서 어디로 걷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어디쯤에선지 지나온 거리가 사진처럼 띄엄띄엄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오데옹을 지나서 생 폴 역 쪽으로 걷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리에 한참 동안 서있는 남자를 보았고, 나는 사라짐에 대한 원리를 알아내려는 과학자처럼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페에 앉고 나서야 다리가 아픈 걸 느꼈다. 많이 걸은 것 같았다. 걸음 수만큼 쏟아져 나온 낱말들이 외투를 푹 적셔서 온 몸이 무거웠다. 


삼거리 모퉁이 카페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이 거리는 항상 사람이 많다. 삼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마치 미술관에 걸린 미디어아트 같다고 생각했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혹시 내 눈앞에 보이는 시간 동안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저렇게 다른 골목으로 사라지고 나면 다시는 내 삶에서 저 사람을 보지 못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만 저 사람이 존재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저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저 거리에 그의 발자국이 짙게 남는 것도 아닐 것이며 내 홍채에 그의 실루엣이 새겨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내 앞에 잠시 나타났던 사람이 곧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나는 지금 이 삼거리의 풍경이 바흐의 음악 같다고 생각했다. 한 번 듣고 나면 다시 읊기 힘든 음악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음표 같은 사람들.


순간 눈앞의 풍경이 흑백으로 변했다. 실은 나는 보이는 이미지를 흑백으로 변화시켜 상상하기를 즐긴다. 그건 디지털카메라에서 간단히 흑백으로 바꾸는 것처럼 내겐 잘 훈련된 조작법 같은 것이다. 난 그렇게 색이 제한된 모습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제한'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느끼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무언가 제한함으로써 비로소 보다 자유롭고 깊은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그건 비록 색깔만 그러는 게 아니다. 음악도, 그림도, 문학도, 사람과의 관계도 그리고 생활도 무한한 옵션보다 옵션 없이 제한된 상태가 그 존재를 더 깊이 있게 해 준다. 제한한다는 것은 절제한다는 것과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도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무언가 자꾸만 확장하고 늘리려고 하는 본능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개인의 존재 가치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게 제한되고 줄어들 때 더 깊은 빛이 난다고 나는 믿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단어가 다른 단어를 물고 나와 마침표 없는 문장이 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끝없는 마술사의 리본을 입안에 넣고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눈앞의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오후였지만 나는 사람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너무나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것을 남긴다. 그것은 의도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문명, 건물, 길, 유서, 유산, 각 나라의 서버에 남은 나의 글과 사진들, 주고받은 메시지, 살던 집, 입던 옷을 남기며 심지어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못한 거짓말까지도 남긴다. 어쩌면 신은 인간에게만큼은 완벽한 삭제 버튼을 부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난 이제 그만 눈을 깜박여서 다시 세상을 컬러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어떤 할머니가 길을 건너서 곧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장바구니와 우산을 든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메리 포핀스 같았다. 그녀가 저 골목으로 사라지면 곧 건너편 건물 너머로 우산을 타고 날아가는 그림자를 보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조금 더 흑백으로 세상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흑백 이미지는 명쾌한 수학 이론 같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같은 것이다. 무언가 사라지고 나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검고 흰 이미지가 품고 있다. 

나는 빈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한 손으로는 메모지에 '완벽하게 사라지는 기술'이라고 썼다. 왠지 깊이 연구하면 그런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건 불가능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저 할머니를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 저 할머니에 대해서 글을 쓸지도 모른다. 저 할머니는 그냥 지나갔을 뿐이지만 내 마음속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누군가 내 흔적을 안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완벽하게 모든 걸 지워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은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숙소에 돌아와서 문을 열 때까지 나는 세상을 흑백으로 보고 있었다. 약간 기운 것처럼 보이는 백 년 넘은 건물의 벽이 다비드상의 콘트라포스토처럼 완벽하다고 느꼈다.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단순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면 완벽에 가깝게 사라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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