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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동 Oct 14. 2021

[책일기] 황정은 <일기>-1장 일기

건강하시길.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데다 공평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문장이 불완전하고

목적어가 없어 모호하며

통상적인 인삿말이 주는 순진한 느낌이고

건강이라는게 누구에게나 동등한것이 아니니 공평하지 않지.  "건강하시길" 이란 말은 그런 것이다.


작가는 이  생각을 한번에 하고 저 문장을 쓴것일까?


황정은의 문장은 입체적이다. 글을 읽다보면 구심점에서 뻗어나간 선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 공간에서 작가의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퐁당 빠져서 박수를 친다. 우와, 대단하다. 언제나 느끼지만 읽을때마다 감탄한다. 이제 겨우 황정은 <일기>의 첫문장 일 뿐인데 말이다.


파주와 종로와 강서구에 확진자가 발생하면 동선을 확인했다. 월요일 몰리김밥 (중략) 금요일 몰리김밥. 노출을 전혀 염두에 두기 않은 하 사람의 생활과 식사, 그런 걸 보면 그런 걸 보고 있다는 것이 민망하고 미안했다. 몰리김밥이 그 동네 맛집인가, 멍하니 생각하기도 했다.



코로나는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여러모로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거론되지만 확진자의 동선을 밝혀 공개하는 것에 대한 잔인성을 무시할 수 없다.


처음에는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하며 나의 동선과 겹쳐지지 않음에 안심했다.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면서는 확진자의 동선을 보며 타인의 생활을 들여다봤다. 어느덧 트루먼쇼 시청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외출이 시작되면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의 동선을 메모하기도 했다. (작가도 그랬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선에 꽤나 신경썼던 것 같다.) 시간별로 적어나가 동선은 정말 별것이 없었고, 그 내용 역시 초라해서 부끄러웠다. 만약 내 동선이 공개됐을 때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다. 와, 정말 하는 일 없는 주부구나. 아, 난 어느새 내 동선이 밝혀질까봐 더더욱 더 외출을 꺼리게 되었다.    


플랭크 2분을 버티며 근래 내 동선이 선이라기보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일할 수 있으니까, 내 주소지에 점으로 머물렀다.


스스로 가둔, 가둘 수 밖에 없는 이 점 속에서 정말 괴로웠다.

작가의 글을 읽고 아, 선으로 움직이던 내가 점이되어 그토록 힘들었구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을 '점'이라 표현하다니 명명백백 너무나 공감이 된다.


얼굴은 피로로 거의 구겨져 있었다.

짧지만 상황은 물론 느낌까지 생생히 전달하는 문장. '피로', '구겨지다' 이 말이면 뭐 끝이지.


동생과 동거인과 나는 사람들이 전염병을 동일하게 겪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바이러스엔 "국경이 없"지만 "우편번호가 건강상태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는다.


혐오는 어디에나 있어. 내게도 있다. 나는 실은 많은 순간 내 이웃을 혐오하고 먹는 입을 혐오한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낼 권리가 내게는 없어. 그런 건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걸 한다. 어디에나 있다.


사건 발생의 상황, 패러독스, 이성과 감성이 무너진 현장.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 하기전 이렇게 역설적인 말을 먼저 꺼내면 호기심이 인다. 왜? 도대체 무엇때문에? 옳고 그름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요즘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 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음악을 들으며 방황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정도의 표현의 고급 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점은 그것이다. '내 삶을 구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타인을 구하는 사람. 자신의 삶으로 멀리있는, 닿지도 않는 곳의 삶까지 구하는 희생. 멈춘 듯하지만 결코 멈춘적 없는 시대를 알려준다.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 되어 있는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어. 날개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 몸이 맥락으로 다른 몸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베란다 눈사람의 눈 블루베리를 가져간 까치를 보며 날고 싶어하는 마음과 연결된다.


황정은의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의식의 흐름인가 싶다가 보면 결국 첫 문장과 처음에 던진 화두로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이야기의 여정을 자분자분 밟아 결국 처음으로 돌아오면 쾌감이 느껴지고 작가와 공감하는 기분이다. 물론 모든 내용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읽다보면 나 혼자 삼천포로 빠져 허우적 거릴 때도 있다. 그럴 땐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지 못한 나를 탓하게 된다.


달도 아직 지지 않는 새벽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내려오는 열차를 생각하는 일은 어쩐지 우주를 생각하는 일과 닮았다. 하지만 그건 우주의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애쓴다.


결국 사람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사람이다. 코로나시대에도 사람은 살고, 죽고, 희노애락을 느낀다.


건강하시기를.

부디.

나도 그녀도 우리모두


인사로 시작로 인사로 끝나는 그녀의 일기는 결국 사람이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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