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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동 Aug 24. 2021

M은 너구리에 청양고추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그녀들

M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너구리 라면이 당긴다.

아니, 너구리 라면이 먹고 싶어 질 때마다 M이 생각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M이 처음으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밤이었고, 함께 술을 마시다가 즉흥적으로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갔다.

밤이어서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꺼렸지만, 그녀는 밤이기 때문에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오빠와 자신이 함께 살고 있는 그녀의 집은 작은 주방이 달린 투룸이었다.

작은 방에는 오빠가, 큰 방에는 어머니와 자신이 지내고 있는데, 친구를 데리고 간 날이면 어머니는 싱크대 아래 얇은 이불을 펴고 주무신다고 했다.

안방에서 이불을 들고 나오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싱크대 아래 이불을 펴고 눕는 어머니를 보며 매우 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 했다.

싱크대는 현관과 매우 가까이에 있어 나는 꼭, 나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가 노숙을 하는 것 같아 매우 마음이 쓰였다.


M은 나를 초대해 마냥 즐거워 보였다.

대뜸 자신이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며 너구리 라면과 함께 청양고추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발아래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든 어머니가 누워있어 나는 멀찌감치 서서 그녀가 라면을 끓이는 모습을 보았다.


도마 위에 청양고추를 어슷 썰고 끓는 물에 넣으며 M이 말했다.

"너구리엔 청양 고추지! 나는 꼭 이렇게 먹어. 고추 없는 너구리는 맹탕이야."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해진 너구리의 다시마 국물.

국물이 목 뒤로 넘어갈 때 청양고추의 매콤함이 혀를 베듯 스쳐 지나가는데 기분 좋은 개운함이 느껴졌다.

기분 잡치는 키스를 하고 입가심이 절실할 때 딱 필요한 맛이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 우리는 매일 기분 잡치는 일들로 가득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맥주를 들이붓던 날이었다.


혀를 감도는 알싸한 고추의 매콤함과 속이 풀리는 뜨끈함을 기억한다.


어머니와 오빠가 깰까 봐 안방에서 둘이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며 밤새 수다를 떨었던 그 밤.

낄낄거리다 서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며 별 것 없는 서로의 속내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꼴딱 밤을 새 버렸으면서, 어머니의 출근 준비 소리에 자는 척하다 정말로 잠이 들었던 그날.

결국 학교를 째고 오후 늦게 일어나 또 너구리를 끊여 먹었다.


청양고추를 넣은 너구리.


나는 청양고추를 품은 너구리처럼 어떻게든 세상에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었고,

M은 세상으로부터 매서운 맛을 보고 있던 시절이었다.


M을 알게 된 것은 20대 초반. 성인이었다.

20대 성인에게 가정형편과 경제적 상황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님의 지원 아래 편하게 학교를 다니고 공부하는 게 왠지 낯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22살을 넘긴 이후엔 항상 그랬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한 개쯤은 교양수업처럼 꼭 하고 있었다.

 

M은 대학을 다니면서 학원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고,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정규 강사로 일을 하여 학생임에도 생각보다 많은 월급은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적은 항상 A+에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았다.

게다가 퇴근 후 술자리까지 참석해 친목 교류활동도 잊지 않았다.


세상에.


그녀의 몸이 진정 한 개 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M은 해야 할 게 많고, 갚아야 할 게 많고 살아내야 하는 날이 많다고 했다.

그때 M의 소원은 몸을 쪼개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

그녀의 소원이 슬퍼 아무 말도 못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 소원은 고작 한 가지 일에만 잘 좀 집중하자 였는데.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아 바쁜 M을 붙들고 징징 거렸던 것 같다.


그런 M을 잘 안 뒤, 그녀의 작은 집에 초대되었기 때문에 가정환경과 형편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나에게 M은 M이었다. 거대한 M이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똑 부러지고, 자기중심적인 연애를 하고, 좋은 물건을 고르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고집 세고, 알 수 없고, 또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매력적인 사람.

   

지금, 들리는 소문에 M은 비건이 되었다던데......

M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제는 너구리 라면을 먹지 않는지 궁금하다.

나는 아직도 너구리 라면을 끓일 때면 청양고추를 꼭, 넣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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