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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변에서 해준의 일그러진 눈을 바라보며 서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울음을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는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2022년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작품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이다. 중국인 서래(탕웨이)는 입국 당시 자신을 도와준 한국인 남편과 살아간다. 해준(박해일)은 형사다. 늘 깔끔한 양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으며 반듯한 품위를 유지한다. 직업 윤리의식과 자긍심이 강한 원칙주의자다. 해준은 사망사건 피해자의 아내이자 용의자로 서래를 처음 마주한다. 그리고 밀물처럼 그녀에게 빠져든다. 남편의 폭력과 집착으로 얼룩진 그녀의 비참한 삶의 이면을 알게 되고 연민한다. 그의 수사는 위험한 관심이 되어 사랑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그는 서래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한 채 무방비한 마음만을 건넨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사건의 비밀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서래가 범인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 해준은 붕괴된다. 투철한 직업 윤리의식도, 자신의 품위를 빚어낸 단단한 자긍심도, 그녀와 주고받았던 감정도 전부 붕괴된다. 해준은 모든 일은 비밀로 하겠다면서 서래의 곁을 도망치듯 떠난다.
하지만 해준이 붕괴된 시점부터 서래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토록 곧은 남자가 사건을 은폐하겠다고 하는 것은, 당신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은 어떤 ‘아이 러브 유’보다 더 큰 사랑 고백임을. 그녀의 공허한 가슴 한구석에 푸른 해수가 들어찬다. 서래의 사랑은 저돌적이다. 순수하다. 그녀는 해준이 이사 간 지역으로 새로운 남편과 함께 향한다. 해준을 잊기 위해 새 남편을 만났음에도 어떻게든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붕괴된 해준의 눈에서 이전 같은 애정을 찾을 수 없다. 그에게 그녀는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무장한 살인자일 뿐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만하냐고 소리 지르는 해준에게 자신이 그렇게 나쁘냐고 서래는 되묻는다. 그녀는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사랑 고백을 홀로 곱씹으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모든 사랑의 증거를 깊은 바다에 던진다.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직선주로를 타고 서로에게 돌진하지 않는다. 꼬인 곡선에서 모서리를 하나씩 두드리며 천천히 나아간다. 그래서 둘의 감정은 더 선명하다. 해준의 수사가 의심에서 사랑으로, 다시 의심으로 가는 길, 서래가 해준의 붕괴를 목격함과 동시에 사랑에 빠져드는 길. 어느 순간 목적지를 잃었지만 분명한 파열음을 내며 나아간다. 비밀과 의심, 거짓과 진실의 그물망에서 사랑의 감정들이 요동친다. 그러나 흩뿌려진 사랑은 거둬지지 못한다. 용의자와 경찰의 관계, 불륜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넘어 해준은 비밀스러운 서래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래는 모든 게 명백해졌을 때 그를 향해 솔직하게 다가갈 힘을 얻었지만 해준은 그렇지 않다. 서래의 비밀이 밝혀질수록 그녀는 더 비밀스러운 여자가 된다. 자신을 붕괴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이사 간 곳까지 따라오는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여자다. 그가 처음 만난 서래는 지금의 서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자신의 감정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한때 사랑이었던 감정은 증오와 불안이 되어 그녀를 겨눈다. 하지만 이미 해준을 사랑해버린 서래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없다. 그녀를 가리던 베일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저 흘러간다. 만남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만남의 결말 또한 영원한 비밀로 만들고자 한다. 비밀의 끝에선 아무것도 없다. 혼란스러운 해준만 서성인다.
서래처럼 깊은 비밀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무슨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런 비밀을 알아버렸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비밀을 공유해야만 진정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누군가는 비밀이란 애초에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만나길 원한다. 지금 내가 아는 당신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비밀은 폭로되는 순간 더는 비밀일 수 없다. 그것은 사실이 된다. 그리고 비밀을 사이에 둔 관계는 재정의된다. 알게 된 이상 상대를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고민을 거부하고 관계를 끝내버리는 때도 있다. 다만 염두에 둬야 한다. 심연에 있던 상대의 비밀이 무겁게 꺼내졌을 때, 그때 상대는 당신을 향한 믿음에 도박을 걸었다는 것을.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눈 뒤에선 이윽고 터져 나올 당신의 반응에 최선의 시나리오를 바라며 숨죽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비밀의 모양만 보고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자. 보이는 사실이 상대의 전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꺼내진 비밀 뒤엔 또 다른 비밀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니 상대를 정말로 안다고 생각한다면, 알고 싶다면 잠시 멈추어 귀를 열자. 낯선 이야기의 음절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받아들이자. 적어도 엎질러진 비밀 앞에서 황망하게 주저앉는 일이 없게. 외면당한 비밀은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비밀의 끝에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뒤늦게 서래를 이해한 해준은 아직도 해변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