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주부, 이제와서 가계 관리를 하려니 무섭다고 느낀다.
우리집의 가계는 남편이 계속 관리해왔다. 결혼하고 맞벌이 일 때도 남편 통장으로 모아서 돈을 관리했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외벌이가 되면서 남편 통장으로 수입이 들어와 관리도 자연스럽게 남편의 것이었다. 그리고 매달 나가는 카드값을 정하지 않았지만, 늘 쓰던 만큼만 쓰면 저축도 하고 필요한 일상을 살아내는데 충분했다.
아이들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식비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엔 물가도 한 몫을 했다. 또 아이들이 어느정도 자라 학원을 다니고 싶어하니 이래저래 학원비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과는 다른 재정 운영이 필요한 상황을 만난거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서 남편은 가계를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곤 나에게 종종 재정에 대한 대화를 걸어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도망다니고 싶기만 했다. '아, 나에게 돈 얘기 하지마. 그냥 나는 안쳐다 보고 싶다고. 우리의 형편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 이런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스쳤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재정 상태를 알게되면 마음이 다칠 것 같았고,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고, 왠지 비참해질 것도 같았달까. 참 이상하고 왜곡 되어 있으면서도 딱히 고치고 싶지도 않은 영역이었다.
내가 돈을 관리할 자신도 없고, 이제와서 관리를 하라니 '갑자기 왜그래? 내가 다시 돈을 근근히 벌기 시작하니까 때마다 부족한 돈을 나에게 달라고 말하는게 싫어서 그러나?' 비꼬아 생각하고 싶어졌다. 남편에겐 그런 의도가 없을거란걸 알면서도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남편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아끼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데도 부족한가? 허리띠를 얼마나 더 묶어야 하길래 이러나, 나를 왜 자꾸 돈으로 괴롭히나' 싶은 감정적인 반응들만 내 안에 가득했다. 남편을 몰아세우는게 나를 방어하기에 좋으니까. 남편을 자린고비로 만들고 나는 대인배인양 나를 포장하는 것이 편안하니 쉬운대로 생각하고 상황을 자꾸 넘어가려고 드는 나를 발견했다.
귀찮은 마음도 크다. 돈은 나에게 수고로운 영역이니까. '내가 할 일이 많은데, 이것까지 관리하라고? 좀 싫은데? 내 영역이 아니야. 거기에 신경써서 돈에 전전 긍긍하고 싶지 않아, 계속 아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는 것도 싫고' 이런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자꾸 나만 옹호하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어린애 같이 느껴졌다.
내가 너무 어리게 반응하는게 이상하다 싶어서 꼬리를 물었다.
돈 때문에 어린 시절이 좀 괴로웠다. 80년대 생들이 대체로 경험했던 삶인 것 같은데(아닐수도 있고), IMF 이후 부도를 맞은 부모님이 돈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걸 보는게 너무나 싫었고 때론 슬펐다. 그리고 막연하게 돈을 번다는 것이 고되고 고통이기만 했다. 돈을 벌고 돈을 대하는 것에는 희생이 따른다고만 느껴졌고, 무엇보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부모님. 돈이 엄마 아빠를 뺏어갔다고 줄 곧 생각했다. 부모님의 부부 싸움의 근원도 늘 돈인 것 같았다. 돈은 무조건 아껴야 하는 것이고, 나의 욕구를 무조건 참아야 했던 이유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니 돈은 억압이자 상처였다.
나의 욕구를 억압시켜야 했던 이유였고, 상실을 경험하게 하고 슬픔과 고통이었던 그런 돈을 관리를 하라니. 그냥 덮어두고 싫었던 거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살아지는대로 편하게 살고 싶지, 우리가 얼마를 벌고 얼마를 써야하고 그런 것에 연연하며 사는게 싫었던 것 같다. 돈을 관리하는 것과 돈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나에게 가계에 대한 계획을 세우자는 말을 하면 , 남편의 태도 자체를 부족한 돈, 부족한 형편과 재정에 전전긍긍해 하는 태도로 해석해버리고 냅다 도망치려고만 했던 거다.
오, 이제는 좀 알겠네.
내가 이렇게 미숙한 방법으로 돈에서 도망가고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리고 남편을 몰아세웠구나.
'그래그래, 내 마음은 이런거지' 하고 헤아려 지면서도 여전히 나는 씨름을 한다.
'아.. 돈에서 자유롭고 싶다. 돈을 만나고 싶지 않고, 돈 관리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웃긴가. 돈에서 자유롭고 싶으면 돈을 만나고 돈의 정체를 알아야지. 도망만 다니고 있느니 자유로울 틈이 있냔 말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돈에서 도망다니고 미숙하기만 할거야?' 나에게 질문하게 된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언제까지고 핑계야 댈 수 있지만, 나에게 성장은 없겠지. 그리고 남편과 반복해서 이 문제로 예민해지고 내 마음은 날이 서겠지 싶다. 이렇게만은 있을수가 없는데 나에게 결단이 필요하다.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 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적, 사회적,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마치 분별력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개인적인 문제를 의식하게 되면 곧바로 아주 쩔쩔매면서 즉각적인 해결을 원했다.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지체되는 시간 동안의 불편함을 견디려 하지 않았다."
"문제 해결에 있어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느라 성급하게 아무 조취나 취하는 것보다 더 유치하고 파괴적인 결함이 있다. ... 그것은 바로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리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이렇게 보면 내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미숙한지 부끄러워진다.
"무력감의 뿌리에는 자유의 고통에서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도피하고 싶은 욕망과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자신의 문제와 삶에 책임지지 못하는 패배감이 깔려있다. 사실 자신의 권한을 버렸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에게 돈이란 무력감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력감에는 스스로 권한을 버리고, 완전히 도피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문제를 책임지지 못하는 패배감이 깔려 있다니. 이제는 더이상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래, 이제 내가 해보자.
도망다니지 말고 이 문제를 직면해보자.
무섭지만 용기를 내본다.
나에게 성장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