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배자의 탄생
제1장. 지배자의 탄생
200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다. 아날로그의 잔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밀어닥친 디지털의 파도는 유례없는 속도로 세상을 침잠시키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네 오락실에서 줄을 서던 아이들이 이제는 집집마다 보급되기 시작한 초고속 인터넷 ‘메가패스’와 ‘하나포스’의 속도를 논했다. 어제의 최첨단이 오늘의 골동품이 되어 쓰레기장으로 밀려나는 기이한 속도의 시대였다.
동네 골목길 대문과 전신주에는 ‘펜티엄 III 800MHz 출시’, ‘초특가 PC 보급’ 같은 문구가 적힌 총천연색 전단지들이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붙어 바람에 나부꼈다. 학교 복도는 쉬는 시간마다 새로 산 컴퓨터 사양을 뽐내는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야, 너네 집은 램이 몇 메가냐?”, “나는 이번에 매직스테이션 신형으로 바꿨어.”
아이들에게 컴퓨터는 단순히 문서 작업을 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인 ‘사이버 월드’로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통행권이자, 교실 내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결정짓는 새로운 권력이었다.
우진의 아버지는 그런 시대의 조급함 속에서도 유독 평정심을 유지하는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가치 있는 물건일수록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역량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는 구시대적이지만 단단한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우진에게 무겁게 입을 뗐다.
“도구가 사람을 앞지르면 안 된다. 기계의 성능이 네 머리보다 좋으면, 너는 기계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될 뿐이야.”
그것은 우진의 집안을 지배하는 확고한 가르침이었다. 아버지는 우진에게 처음부터 번쩍거리는 신형 모델을 안겨주는 대신, 중고 기기를 통해 컴퓨터의 하드웨어 구조와 운영체제의 원리를 충분히 익힐 것을 제안했다.
“이 낡은 기계로 네가 원하는 것을 다 해낼 수 있게 되면, 그때 비로소 가장 좋은 놈을 사주마.”
우진은 그 합리적인 제안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고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은 오히려 우진의 치밀한 적성에 완벽히 부합했다.
그 무렵, 우진의 귀에 흥미로운 정보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 같은 반 친구인 윤우의 아버지가 용산 전자상가에서 ‘큰손’으로 통하는 발 넓은 지인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용산은 일반인들에게는 미로와 같은 블랙박스였지만, 아는 사람을 통하면 시중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고성능 부품을 맞출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윤우가 그 지인을 통해 최신형 펜티엄 CPU가 탑재된 중고 컴퓨터를 헐값에 구매할거라는 소식은 금세 반 아이들 사이에 퍼졌다.
우진의 아버지와 윤우 아버지는 동네에서 형님 아우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돈독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윤우네의 성공적인 구매 사례를 듣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낡은 애니콜 폴더폰을 열었다. 투박한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어, 윤우 아빠. 나 우진이 애비야. 잘 지내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우리 우진이도 컴퓨터를 한 대 들여주려고 하는데. 윤우가 이번에 용산 쪽에서 아주 알차게 맞췄다며? 우리 우진이도 윤우가 산 거랑 똑같은 사양으로 하나 부탁 좀 하세. 중고라도 상관없으니 확실한 놈으로 말이야. 돈은 내가 수고비 넉넉히 얹어서 보낼 테니까.”
우진은 아버지의 옆에서 수화기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이, 형님! 우리 사이에 무슨 수고비는요. 제가 용산 그 친구한테 잘 말해놓을게요. 윤우 거보다 더 쌩쌩하게 돌아가는 놈으로 골라오라고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윤우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스피커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우진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바람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멀리 용산 쪽의 하늘은 정체 모를 불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른들의 우정과 의리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는 이 거래가 자신에게 어떤 세계를 열어줄지, 우진은 아직 알지 못했다.
며칠 뒤, 우진의 방에 드디어 ‘그것’이 입성했다. 들뜬 마음으로 테이프를 뜯어내고 박스에서 본체를 꺼냈을 때, 우진은 잠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기계는 누가 봐도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티가 역력했다. 본래는 세련된 아이보리색이었을 본체와 모니터 케이스는, 마치 수십 년간 골목 끝 담배 가게에 방치된 것처럼 얼룩덜룩하고 탁한 황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모니터 옆면에는 누군가 붙였다 뗀 스티커의 끈적한 자국이 먼지와 엉겨 붙어 검게 변해 있었고, 케이스 틈새마다 죽은 벌레의 잔해 같은 이물질이 끼어 있었다.
전원을 연결하기 위해 본체 뒤편으로 손을 뻗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랫동안 묵혀둔 종이 더미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뜨겁게 달궈진 전선에서 새어 나오는 비릿한 금속 향, 그리고 정전기 특유의 톡 쏘는 탄내가 우진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우우웅— 드르륵, 덜덜덜.’
전원 버튼을 누르자 본체는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쿨링팬은 축이 뒤틀렸는지 본체 전체를 진동시키며 요란하게 돌아갔다. DOS 화면의 투박한 흰색 글씨가 까만 화면을 채우기까지는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하드디스크가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소리는 부드러운 회전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녹슨 칼날로 칠판을 긁는 듯한 신경질적인 금속성 마찰음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실망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버지가 강조했던 ‘적응의 시간’이란, 본디 이런 불쾌한 소음과 냄새를 견디며 기계와 교감하는 과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의 인내심은 우진의 믿음보다 훨씬 짧았다. 설치한 지 불과 사흘째 되던 날, 화면은 예고도 없이 섬뜩한 코발트 빛으로 물들었다. 이른바 ‘블루스크린’이었다. 알 수 없는 영문 기호와 숫자들만이 가득한 그 푸른 지옥 속에서 마우스 커서는 허공에 박힌 못처럼 얼어붙었다. 당황한 우진이 키보드의 ‘Esc’와 ‘Enter’를 미친 듯이 눌러보았지만, 기계는 오만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본체에서는 여전히 과열된 열기만이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장 앞에서 우진의 화살은 곧장 자신을 향했다.
‘내가 너무 무리하게 돌렸나? 어제 30분 더 게임을 한 게 문제였을까?’
우진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오류는 입력값의 문제였다. 논리적인 기계가 작동을 멈췄다면, 그것은 필시 사용자인 자신이 잘못된 명령을 내렸거나 기계의 한계를 시험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무지는 우진에게 있어 가장 큰 죄악이었고, 그 죄값은 자책이라는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가슴을 눌렀다.
다음 날 학교, 쉬는 시간의 소란스러운 복도에서 우진은 멀리서 걸어오는 윤우를 발견했다. 우진은 입술을 깨물다 조심스럽게 윤우의 앞을 막아섰다.
“윤우야, 저기… 나 며칠 전에 받은 컴퓨터가 벌써 좀 이상해. 화면이 자꾸 멈추는데, 혹시 너도 그래? 내가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걸까?”
윤우는 가방끈을 고쳐 매며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악의도, 숨겨진 의도도 없어 보였다.
“응? 내 건 완전 멀쩡한데? 아, 나는 엄마가 공부하라고 딱 하루에 한두 시간만 시켜주거든. 그래서 고장 날 틈이 없나 봐. 너 어제 밤새워서 한 거 아니야? 너무 열심히 하면 기계도 지치지.”
‘역시, 내 잘못이었어.’
윤우의 대답은 우진의 가슴에 쐐기를 박았다. 똑같은 곳에서 온 기계인데 윤우의 것은 멀쩡하다는 사실은, 결국 우진 자신의 ‘관리 부실’을 증명하는 완벽한 근거가 되었다.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해 준 귀한 자금을 자신의 무모함으로 탕진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 우진은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검은 모니터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마치 기계의 비웃음처럼 들렸다. 우진은 낡은 컴퓨터 매뉴얼을 펼쳐 들고 밑줄을 쳐가며 자신의 실수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떤 조작이 이 완벽해야 할 도구를 망가뜨렸는지 찾아내야만 했다. 무지로 인해 발생한 이 쓰라린 결괏값을 수정하기 위해, 우진은 스스로를 더욱 가혹한 논리의 감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든 매뉴얼에는 애초에 이 상황에 대한 정답이 적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진실이 그 흉측한 민낯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부모님들의 정기 계모임 날이었다. 2000년대 초반, 계모임이란 단순히 밥 한 끼 먹는 자리를 넘어, 은근한 재력을 과시하고 인맥의 견고함을 확인하는 정보의 장이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호스트를 맡는 것이 관례였고, 그날의 무대는 공교롭게도 윤우네 집이었다.
우진은 평소보다 유독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모님의 뒤를 따라 윤우네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방에 놓인 고물 컴퓨터의 오류 코드를 어떻게 수정할지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을 메운 것은 어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비릿한 소주 냄새,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진 갈비찜의 진한 향기였다.
“어이구, 우진이 왔구나! 자, 애들아. 어른들 얘기하게 너희는 들어가서 놀아라. 윤우야, 친구들 데리고 방에 가 있어!”
윤우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호탕했고, 우진의 아버지를 향해 연신 술을 따르는 그의 손길은 더없이 친근해 보였다. 윤우의 안내에 따라 방문이 열리는 순간, 우진은 뒤따라오던 친구들의 감탄사와 함께 그 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굳어버렸다.
윤우의 책상 위에는 우진의 방에 놓인 그 흉물스러운 누런 고물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부시게 하얀 진주색 광택을 내뿜는 최신형 슬림 타워 본체였다. 그 곁에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대형 평면 모니터가 위풍당당하게 놓여 있었고, 갓 비닐을 벗긴 듯한 신상 잉크젯 프린터에서는 새 기계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났다.
윤우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원을 켰다. 우진의 고물처럼 짐승의 비명을 지르지도, 방 전체를 진동시키지도 않았다. 본체 내부에서 들려오는 팬 소리는 마치 고급 세단의 엔진음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공기 흐름만을 만들어냈다. 화면은 단 몇 초 만에 선명한 윈도우 로고를 띄우며 마법처럼 구동되었다.
“윤우야… 너 컴퓨터 새로 샀어? 저번에 그 용산에서 가져왔다던 중고는 어쩌고?”
우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주머니 속의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 박동이 고막을 때릴 정도로 요동쳤다. 윤우는 윈도우 화면 위에서 마우스를 가볍게 휘저으며, 오히려 우진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천진하게 되물었다.
“응? 무슨 소리야. 이게 너랑 같이 샀던 그 컴퓨터인데? 우리 아빠 아는 아저씨가 용산에서 직접 골라온 거잖아. 너도 같은 거 아니야?”
순간, 우진의 사고 회로가 과부하 걸린 기계처럼 정지했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흩어져 있던 데이터들이 잔인한 논리로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같은 금액, 같은 날짜, 같은 구매처. 그리고 같은 구매자...’
모든 변수는 동일했다. 그러나 결과값은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윤우의 아버지는 우진의 아버지가 건넨 돈을 가로채 제 아들에게는 최신형 기계를 선물했고, 우진에게는 용산 어느 구석에서 폐기 직전의 쓰레기를 주워다 던져준 것이다. 남은 차액은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을지, 그 돈으로 차려진 저 거실의 갈비찜이 얼마나 기름질지 보지 않아도 선명했다.
우진의 머릿속에서 ‘자책’이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 자리에 거대한 ‘경멸’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능하다고 탓했던 며칠간의 밤들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세상은 노력이나 실력이 아니라, 이런 추악한 설계와 기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그랬지? 내가 착각했네.”
우진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었다. 방금 전까지 요동치던 심장은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윤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께서 고장 난 건 그냥 버리라고 하시더라고. 내일 바로 새로운 컴퓨터 사기로 했어. 삼성 매직스테이션 풀세트로 말이야.”
자동 출력된 거짓말을 뒤로한 채 우진은 시선을 돌렸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윤우 아버지의 위선적인 웃음소리가 이제는 역겨운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우진은 깨달았다. 이 비릿하고 불쾌한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체스판’을 짜야 한다는 것을.
우진의 진정한 게임은, 누렇게 변색된 중고 모니터가 아닌, 저 추악한 어른의 민낯을 확인한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우진의 말이 공중에 채 흩어지기도 전에, 윤우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쏟아냈다. 그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의심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열패감과 부러움이 서려 있었다.
“와, 진짜 대박! 우진아, 너 이번에 TV 광고에 나오는 그 펜티엄 신모델 말하는 거지? 본체가 은색으로 빛나는 거! 나도 그거 진짜 사고 싶어서 아빠한테 졸랐는데 안 된다고 했거든. 와, 너 진짜 좋겠다!”
윤우의 해맑고도 멍청한 부러움을 등 뒤로 흘리며 방을 빠져나오는 우진의 발걸음은 유령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동시에 불을 뿜는 슈퍼컴퓨터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거실에서는 여전히 어른들의 무지한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웃음의 진원지이자 소음의 중심에는, 우진의 아버지가 건넨 신뢰의 대가를 가로채고 제 자식에게는 최신형을, 타인의 자식에게는 산업 폐기물을 배정한 장본인. 윤우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지금 깎아 놓은 사과를 아삭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고 정직한 ‘어른’의 얼굴을 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진은 거실 한복판으로 걸어가 그 기만적인 풍경의 중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 차분하고 무해한 소년의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윤우 방에서 보니까 번쩍거리는 신형 컴퓨터를 산 것 같던데… 저랑 같이 샀다던 그 중고는 누구 줬어요?”
순간, 윤우 아버지의 손길이 허공에서 화석처럼 멈췄다. 포크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사과 조각이 그의 당혹감을 대변하듯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는 씹던 사과를 삼키지도 못한 채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뇌 속의 지저분한 변명 카테고리를 뒤지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그는 노련하고도 가식적인 어른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응? 아, 그거… 하하, 그거 말이지? 그건 이미 윤우 사촌 동생네 집에 보냈단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거짓말이었다. 그것도 아주 서투르고 조잡하며 급조된 종류의 것. 우진은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찰나를 포착했다. 그 떨림은 명확하게 ‘거짓’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저씨가 직접 구해주신 제 컴퓨터가 집에 온 지 사흘 만에 완전히 고장이 나서요. 화면에 파란 글씨만 뜨고 아예 안 켜지거든요. 그래서 혹시 윤우가 쓰던 중고가 남아 있으면, 제가 아빠한테 잘 말씀드려서 다시 사려고 했거든요. 아까 보니까 윤우 방에 있는 건 새로 산 컴퓨터 같아 보여서요.”
우진의 아버지가 영문도 모른 채 곁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그래, 윤우 아빠. 역시 중고는 함부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뼈저리게 깨달았네. 자네도 괜히 그 컴퓨터 사촌 줬다가 고장 나서 원망만 듣지 말고 잘 확인해 보게나. 우리 우진이가 기대를 정말 많이 했는데, 사흘 만에 뻗어버리니 실망이 커서 내가 다 미안하더라고.”
윤우 아버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우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갑게 날을 세운 쐐기를 박았다.
“아저씨가 정말 어렵게 구해주신 건데, 사흘 만에 그렇게 된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요. 마침 다음 주에 저희 외삼촌이 집에 오시기로 했거든요. 컴퓨터 전공이니까, 제 컴퓨터를 아예 통째로 뜯어서 부품 하나하나 다 검사해 보려고요. 우리가 정말 제값에 맞는 컴퓨터를 산 건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한 건지 확인해 주신대요. 결과가 나오면 아저씨께도 꼭 알려드릴게요. 혹시 용산 그 가게가 아저씨까지 속인 걸 수도 있잖아요?”
공포의 그림자가 윤우 아버지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전문가가 기계를 분해하여 내부를 낱낱이 파헤친다는 말은, 그의 조잡한 설계가 무너져 내릴 최후의 심판과도 같았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경직된 입술을 달싹여 새로운 변명을 제조하려던 찰나, 결정적인 타격이 그의 등 뒤에서 날아왔다.
"아빠! 나도 새 컴퓨터 사줘요! 우진이랑 같이 산 저 중고 컴퓨터 말고, 매직스테이션 사주세요!"
닫혀 있던 방문이 경쾌한 마찰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튀어나온 윤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해맑아 잔인했다. 그 목소리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던 거실의 공기를 단숨에 영하로 떨어뜨렸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우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 조각이 멈췄다. 아삭거리는 경쾌한 식감을 즐기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며 거무죽죽한 흙빛으로 변해갔다. 입안에서 채 씹지 못한 사과 조각이 혀끝에서 볼품없이 굴러다녔지만, 그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있던 우진의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 꽂혔다. 그들의 표정은 갓 구워낸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 윤우야. 네 방에 있는 컴퓨터가... 나랑 같이 산 컴퓨터라고?"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의아함이 서린 목소리였지만, 그 이면에는 서늘한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윤우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응! 저게 너랑 같이 산 컴퓨터라니까! 그때 아빠가 우리 둘 거 용산 가서 직접 싣고 온 거잖아. 아빠, 그치? 아빠가 그때 그랬잖아, 우진이네 거랑 똑같은 거 사 오는 거라고!"
윤우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동의를 구했다.
우진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순진한, 그래서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파는 잔인한 눈빛으로 윤우 아버지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그의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아저씨, 윤우가 뭔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거죠? 분명히 제 컴퓨터는 고물이었는데."
"아, 그게… 그러니까… 그, 글쎄다… 아저씨가… 그게 착오가 있었나 본데… 그게… 확인을 좀 해봐야겠네…"
윤우 아버지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평소 거침없던 그의 달변은 온데간데없고, 눅눅한 설탕처럼 녹아내려 질척거리는 변명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비겁한 변명이 채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우진의 아버지가 차갑게 말을 가로챘다. 평소 이웃 간의 정을 강조하던 온화함은 자취를 감추었다.
"상황을 보니 더 이야기해서는 서로 추한 꼴만 보겠군. 윤우아빠, 어떻게 하겠나?"
우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실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그리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내가 전문가를 부르기 전에, 자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
무거운 침묵이 거실의 천장을 짓눌렀다. 배신당한 친구의 타오르는 눈빛과 진실을 요구하는 아이의 써늘한 시선 사이에서 윤우 아버지는 갈 곳을 잃고 시선을 바닥에 떨구었다. 거실 바닥의 무늬가 마치 개미 떼처럼 일렁이는 듯했다. 우진은 이 모든 풍경을 마치 제3자의 실험 결과 데이터를 분석하듯 건조하고 냉정한 눈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침묵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윤우 말이 맞다면 제 컴퓨터는 배송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우진은 공포와 수치심에 질려 동공이 흔들리는 윤우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걸음 다가갔다. 우진의 그림자가 윤우 아버지의 발등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아저씨는 판매자랑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셨죠? 그럼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제가 오늘 윤우 방에 있는 저 컴퓨터를 가져갈게요. 원래 저희가 지불한 가격에 맞는 물건이니까요. 대신 우리 집에 있는 그 고물은 아저씨가 가져가세요. 아저씨가 말씀하신 그 '지인'이라는 분에게 환불을 받으시든, 배달 사고에 대해 따지시든,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우진의 제안은 빈틈이 없었다. 정교하게 짜인 덫과 같았다. 만약 윤우 아버지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당황하거나 거절한다면, 그는 스스로가 친구의 돈을 가로채 제 아들에게 좋은 물건을 사주었다는 파렴치한 범죄를 자인하는 꼴이 된다. 우진의 아버지는 아들의 냉철한 판단에 힘을 싣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쐐기를 박았다.
"아는 사람이라 믿고 맡겼더니 결과가 참담하군, 이견 있으면 지금 말하게.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그리고 다음 주에 우리 처남이 와서 저 컴퓨터 사양 확인했을 때, 만약 터무니없는 게 들어있는 게 확인되면, 난 오늘 가져가는 저 컴퓨터도 환불할 걸세. 자네가 직접 연락하기 껄끄럽다면 나한테 판매 담당자 연락처를 주게. 내가 직접 따져 묻지."
윤우 아버지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은 붉다 못해 보라색으로 달아올랐고, 번들거리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변에 앉아 있던 다른 어른들이 이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민망한 듯 억지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에이, 윤우아빠가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나 보네. 실수를 했겠지! 우진아, 아저씨가 너희 집 거 챙기다가 깜빡하고 바뀐 모양이다. 착한 네가 어른 실수 한 번 너그럽게 용서해 드려라. 이웃끼리 왜 이래, 응?"
그것은 가해자의 비겁함에 동조하는 역겨운 중재였다. 하지만 우진은 그 가식적인 미소를 단칼에 베어버리듯 차갑게 대꾸했다.
“아저씨, 사과하세요.”
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실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만큼 또렷했다. 방금 전까지 '이웃 사촌'이니 '착오'니 하는 단어들로 상황을 유야무야 덮으려던 어른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그들은 우진의 눈에서 열세 살 소년 특유의 치기 어린 분노가 아닌, 상대를 해부하려는 듯한 냉정한 이성을 보았다.
우진에게 있어 사과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감정의 배설이나 극적인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인과관계를 바로잡고,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공인함으로써 피해자와의 권력 관계를 명확히 기록하는 최소한의 ‘절차적 행위’였다.
결국, 자신의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리고 평생을 형 동생 하며 지내온 이웃들 앞에서 윤우 아버지는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뒷덜미에 맺힌 식은땀이 거실 등 아래에서 비굴하게 번들거렸다.
“미안하다, 우진아. 아저씨가… 정말 나이가 들었나 보구나. 잠깐 착각했나 봐.”
마지못해 쥐어짜 낸 사과가 거실 바닥에 비참하게 흩어졌다. 그것은 진심이 담기지 않아 푸석거리는 먼지 같았지만, 우진은 그 굴욕적인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기묘한 후련함을 느꼈다. 상대의 가면을 완전히 벗겨냈다는 정복감이었다.
일주일 뒤, 우진의 집 거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거실 한복판에는 우진이 윤우네 집에서 ‘전리품’으로 챙겨온 컴퓨터 본체가 그 속살을 드러낸 채 놓여 있었다. 우진의 집에 방문한 외삼촌은 본체를 열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한참 동안 내부를 들여다보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혀를 끌끌 찼다.
“매형, 이건 정말 너무하네요. 그냥 중고 수준이 아니라 이건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케이스는 특수 약품으로 그럴싸하게 새것처럼 보이게 해놨지만, 속은 완전히 썩었습니다. 아니, 썩었다는 표현은 부족하네요. 이건 폐기물 수준이에요.”
컴퓨터를 전공한 전문가답게 외삼촌의 눈은 날카로웠다. 그는 핀셋으로 먼지가 낀 기판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부품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짚어냈다.
“이 메인보드 보이시죠? 이미 단종된 지 5년도 더 된 구형입니다. 그래픽카드와 램, 파워서플라이까지… 전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폐급 부품들을 조잡하게 짜깁기해 놨어요. 제대로 호환조차 되지 않는 부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놓은 겁니다. 이건 실수가 아니에요. 애초에 기계에 어두운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작정한 명백한 사기이자 기만입니다. 이런 물건을 새 컴퓨터라 속여 팔다니, 정말 양심도 없는 놈이네요.”
외삼촌이 열어젖힌 본체 속에는 폐급 부품들과 더불어 어른들이 쌓아 올린 지독한 배신의 퇴적층이 도사리고 있었다. 윤우 아버지가 제 자식에게만은 최고를 주겠다며 거액을 지불하고 지인에게 부탁했던 그 물건조차 실상은 수명이 다한 고물을 짜깁기한 껍데기였다. 용산의 판매자는 자신을 믿은 지인을 비웃듯 쓰레기를 넘겼고, 사기를 당한 줄도 모른 채 허영심에 부푼 윤우 아버지는 우진의 가족에게 하급 중고품을 떠넘기며 잇속을 챙기려 했다.
우진은 거실 소파에 앉아 이 비릿한 먹이사슬을 차분히 그려보았다. 최정점에는 지인을 등쳐먹은 판매자가, 그 밑에는 눈앞의 이득을 위해 신뢰를 판 윤우 아버지가, 그리고 사슬의 말단에는 어른들이 건넨 ‘호의’라는 독배를 마신 소년들이 있었다. 평생을 이웃으로 지내온 신뢰와 아이들의 순수한 우정마저 저렴한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추악한 연쇄극이었다. 도덕과 상식으로 포장된 세계가 얼마나 위선적인 토대 위에 있는지, 우진은 그 민낯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 처참한 진실을 마주한 우진의 마음속에 차오른 것은 분노나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서늘한 해방감이었다. 상대가 먼저 규칙을 어겼고, 그 규칙조차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확인한 순간 우진을 짓누르던 도덕적 부채감은 완벽히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미안함이나 우정 같은 거추장스러운 단어에 자신을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우진은 또한 깨달았다. 세상은 교과서적인 정의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결정적인 증거를 선점하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상대를 무너뜨릴 판을 짜는 ‘설계자’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느라 낭비했던 에너지는 이제 오로지 자신을 지키고 상황을 장악하는 데에만 집중될 준비를 마쳤다.
우진은 마치 승전국 장군처럼 당당하게 삼성 매직스테이션 앞에 앉았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틱’ 하는 경쾌한 소음과 함께 액정 위로 우진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화면 속 아이는 더 이상 관계에 눈물 훔치거나 어른들의 옹졸함에 상처받는 소년이 아니었다.
본체 내부에서 돌아가는 냉각팬의 미세한 진동이 책상을 타고 우진의 손끝으로 전달되었다. 차가운 눈동자 속에서 윈도우 시작 화면이 푸른 빛을 발하며 일렁였다. 그것은 감정에 휘둘리던 시대가 저물고, 냉철한 설계자로서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고요한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