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밑바닥을 헤매던 인간의 무모한 도전기 프롤로그
어느새 청년의 마지노선인 만 34세가 되어버린
미혼, 백수, 고졸, 남자, 겁쟁이
적나라하고 창피한 타이틀의 주인공은
바로 저입니다.
혹시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라는
일본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는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친구들과 놀기만 좋아하는 주인공 사야카처럼 저의 학창 시절도 공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정확히는 아예 놓아버렸다는 게 맞을 정도로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운동부 친구들 덕에 전교 꼴찌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하위권 중 한 자리는 언제나 저의 차지였습니다. 사실 성적보다 더 큰 문제는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저에겐 든든한 팬클럽이 있었습니다. 극 중 사야카의 어머니처럼 저의 어머니도 성적에 관해서 걱정은 하셨지만 부담은 주지 않으셨고, 최소한 도덕적으로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이끌어 주시면서도 저의 선택과 꿈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이렇듯 언제나 진심으로 저를 대해 준 그녀 덕분에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며 아슬아슬하게나마 적자의 삶을 면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깨어있는 삶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약하고 끈기 없고 목표마저 없어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기 일쑤인 데다, 그럴 때마다 방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의 삶을 지내다 잠시 정신이 들면 다시 얼마 못 갈 직장인의 모습이 되길 반복했죠. 적는 내내 부끄러워서 팔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그래도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그래야 변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지금의 저는 히키코모리와 직장인의 반복 루틴 중 히키코모리인 상태입니다. 아니, 상태였습니다. 과거형으로 고친 이유는 히키코모리는 맞지만 목표가 생긴 히키코모리이기 때문이에요. 뜬금없지만 저의 목표는 간호사입니다. 정확히는 '법의간호사'예요.
최근 대략 두 달간 기생충 같은 삶을 살았지만 MBTI의 N 보유자답게 생각과 망상은 열일 중이었는데 그 주제는 대부분 저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기존에 해오던 본업(시장이 좁아서 밝힐 순 없습니다.)은 내부고발자라는 타이틀로 인해 블랙리스트나 마찬가지인 처지라 복귀는 어려운 게 현실이고, 업계 전망도 세기말에 접어드는 중이라고 스스로도 판단하고 있었기에 아예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에 접어든 만큼 이제는 중도포기해 버리면 경험했다는 말로 위안을 삼을 수도 없기에 이번 생에 마지막 직업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성향에 부합하면서도 가치관(보람 혹은 인류애)에 맞는 일. 목표가 단순하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거대해서 취업 이후에도 쉽사리 안주하지 않는 일. 그러면서도 가슴이 뛰는 일. 그런 일이라면 압박감이 밀려와도 이전보다 몇 번은 더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서두에 언급했듯 저는 고졸입니다. 간호학과는 물론이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은 커녕 이와 관련한 공부 경험조차 전무해요. 그런 제가 간호 쪽에 관심이 생긴 건 인정하기 싫지만 전 여자 친구가 간호조무사였기 때문입니다. 직업에 자부심이 넘쳤던 그녀는 자주 제게 간호조무사를 추천하고는 했어요. 평소 살림을 좋아하고 남을 돕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저의 성향이 잘 맞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말이죠. 비록 갈 수 있는 분야는 한정적이겠지만 남자 간호조무사의 수요가 제법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포함해서요. 당시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헤어진 이후 종종 간호복을 입은 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구직사이트에서 괜히 한 번씩 간호조무사를 검색하기도, 집 근처에 간호학원이 있는지, 남학생은 있는지 기웃거려도 보았습니다. 유튜브나 방송 매체에 간호사 혹은 간호조무사가 나오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건 그녀가 해 준 조언이 이제야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1차 목표는 간호조무사이지만, 최종 목표는 간호사 면허 취득 후 법의간호사에 도전하는 것으로 설정해 보았습니다. 법의학 관련 프로그램 덕후라는 이유와 더불어 아직 미개척된 분야라는 가능성 0%에 가까운 불가능한 목표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간호조무사가 되어 취업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요. 물론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시키는 다른 일을 만날 수도 있고, 정말 잘 맞는 분야에서 인정받아 흔들릴 수도 있고, 불가항력에 가까운 현실적인 부분들로 목표를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최대한 끝까지 정면승부해 보는 걸로.
Thanks to.
며칠 전 가족에게 저의 이런 무모한 목표를 밝혔습니다. 잦은 실패와 번복의 전력이 있었기에 떳떳하지 못한 저를 이번에도 응원해 준 어머니. 아는 것이라곤 알파벳이 전부인 저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겠다고 자청한 남동생. 두부멘탈인 큰오빠의 고민을 끈기 있게 들어주고 위로해 준 여동생. 평생 밑바닥을 헤매던 인간인 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고 기다려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게을렀던 만큼 몇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더는 포기해서도 안 되고요.
앞서 소개한 영화 속 대사로 다짐을 대신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