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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Nov 08. 2023

바람난 집순이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다. 집순이 대회가 있다면 아마 동메달 정도는 거뜬히 딸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올해 1년 동안엔 집 밖을 꽤 많이 돌아다녔다. 그동안 자발적 집순이가 되어 집에만 있었던 것에 비하면 별 이유도 없이 이렇게 밖으로 나돌아 댕긴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물론 대부분 혼자 돌아다니지만 집에만 있는 것보단 좋은 징조인 것 같다. 시간만 된다면 우리나라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남피랑길과 동피랑길을 걸어보고 싶은데, '구복이 위루하여' 아직은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결단 새삼 부럽다. 무얼 포기하면 갈 수 있으려나.


해변열차를 따라 흐르는 바다 정경은 탄성이다
오래 된 송정역사
해운대 미포에서 해변열차를 타고 도착한 송정바다를 걷다가 차를 마셨다. 바다는 역시 철지난 바다가 쓸쓸하고 조용하고 운치있다


식구라곤 동생과 나밖에 없어서 번잡스럽지 않고 둘이 살기에도 좁지 않은 집이라 내 공간도 충분하지만, 가끔 더 조용하게 고립되고 싶을 때가 다. 그럴 땐 멀리 가지 않고 호텔에 간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고 나를 위해 누군가가 준비해 둔 깨끗한 침대에 누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함만만끽한다. 음악도 듣지 않고 도 읽지 않는다. 그저 걷고 싶은 만큼 걷다 들어와 잠 오면 자고 깨어 있고 싶으면 깨어있는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조식을 먹고 다시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올해는 꽤 여러 번 남쪽 도시와 바닷가가서 그렇게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해운대의 이 뷰가 좋다


인생의 큰 반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꿈꾸는 반전이란 결국 해피엔딩이라는 정해진 수순 위에 현실의 답답함을 이겨나갈 카드게임의 조커 같은 그런 의미일 뿐이다. 렸을 때 생각했던 인생이란 그저 다리 저편에 불가항력적으로 완강하게 서 있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그저 막연하고 두려움만 앞섰다. 그 벽이 두려워 주춤거리다가도 젊다는 이유 하나로 눈을 감고 벽을 향해 돌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탄탄한 장벽의 가녘을 따라 그저 산책하듯 살고 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조용하고 지루하게, 어차피 내 인생이니까 내 마음이다.


걸으면서 보는 풍경이 모두 아름답진 않다. 끝이 지리멸렬할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인생처럼, 그냥 걷는다. 아름답거나 혹은 비루한 풍경들 속 나 또한 하나의 풍경이 될 뿐이다. 언제 다시 집순이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바람난 순이로 살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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