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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08. 2023

남도의 가을에 무젖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인식한 사실은 귀뚜라미는 낮에도 우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여수에서도 순천에서도 여기 담양에서도 환한 대낮에 귀뚜라미가 운다. 내가 사는 소란스러운 도시의 귀뚜라미는 밤에만 울었다. 아니 밤에만 들렸다.


왁작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나 사위는 고즈넉하고, 간혹 들려오는 차소리도 희미해져 간다. 오늘은 전라남도 여행 4일 차, 내일이면 밤에만 귀뚜라미가 우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섶에 앉아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산책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 풍경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플레이 리스트에 미리 준비해 간 가을 음악도 나지막이 틀었다. 오늘이 일 년 중 바로 그날, 가을을 만난 날이다. 나는 벼락처럼 쏟아진 이 가을의 고요함에 무젖는다. 그윽한 늦은 오후, 이 여유로움이 갑자기 서러워졌다. 보고 싶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어 그들의 안녕을 타전한다.


담양 메타프로방스


2년쯤 전에 이름처럼 갑자기 돌발성 난청이 찾아왔다. 한쪽귀가 물속에 잠긴듯한 그 느낌은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기이했다. 워낙 예민한 사람이라 상대의 목소리 톤이 조금만 달라져도 바로 집어낼 수 있는 나였는데 그 예민한 감각이 한순간 먹통이 된 그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인지 일찍 병원을 찾았고, 삼십 퍼센트의 확률에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 혹시나 재발할까 귀에 조금의 이상음이 들리면 긴장하게 된다. 의사 선생님은 재발가능성이 낮다고 하시고, 청력이 청년 수준으로 돌아왔다고 웃으시지만 성격상 워낙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요즘은 이어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인공의 소음이 전혀 없는 곳에 앉아 있으니 오히려 귀가 먹먹해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동도와 여수 밤바다
순천만 습지
죽녹원 추월정 카페와 대나무 길
소쇄원

다음 계절을 마중하러 떠난, 하루에 2만보씩 걸었던 4박 5일간의 남도여행.  몸은 무겁지만 여수의 밤바다소리도, 순천만의 갈대가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도, 소쇄원 광풍각에 앉아 듣던 물소리도, 죽녹원 대나무들의 댓잎이 섯도는 소리도 귀에 꾹꾹 눌러 담는다. 당분간은 이 소리들을 기억하며 듣기 싫은 소리에도 조금 덜 예민하기를,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기를 바라본다.


죽녹원


힘껏 기다리지 않아도 다음 계절은 시간 맞춰 온다. 남도의 가을을 뒷좌석에 태우고 내일은 으로 돌아간다.



#여수 #순천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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