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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01. 2023

의식의 흐름, 산책

책 읽기, 교보문고, 전포 카페거리, Y2K, 독자


맥락 없다. 무질서하다. 의식의 흐름은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의식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의 연결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순차보다는 공간의 성격에 따라 의식이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의식이 흐른다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당연한 증거이고, 의식이 고이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고 의식대로 흘러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때로는 의식이 흘러간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칼 융이 우리 내면엔 또 하나의 자신이 있다고 했으니 적어도 우리 모두는 이중인격자인 셈인데, 무의식은 포장할 수도 없으니 어찌 보면 무의식 속의 나가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생각한 대로' 보다 '나도 모르게'가 익숙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건가.


요즘 을 고르다가 히뜩히뜩 놀란다. 어느새 나는 턱없이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는 책들만 무의식적으로 고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누군지 뵙지도 못한 알고리즘이란 생명체가 내게 추천한 책들을 검지 딸깍 딸깍 쓸어 담고 있었다. 현란한 감언에 속아 어어 우우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들인 책들은 읽다가 던져버리기 일쑤다. 며칠 전 인터넷서점에서 배송되어 온 책은 예쁜 양장 표지의 문구가 다였다. 뭔가 있겠지라는 기대로 책장을 펼쳤으나 그냥 지지부진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아포리즘식의 겉절이다. 내 의식의 흐름은 정녕 반편이었던 걸까.



올여름,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얼마 전 통영을 다녀온 이유는 8할이 박경리 기념관 때문이다


좋은 책이란 단숨에 폭풍처럼 읽혀야 하는 동시에 꼼꼼한 재독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 들어 반도 읽지 못하고 치워 둔 책들이 쌓이는 것이 마음 불편하다. 쓰는 사람은 사력을 다해서 썼을 게다. 그렇지만 읽기가 고역인 책들은 어쩔 수 없이 손절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간이 책장에 포개져 있던 책들을 서재 책장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쓰는 능력은 없지만 읽는 능력은 꽤 쓸만하다고 자부하는 이 독자는 요즘 좀 당황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예전에 읽은 책들을 다시 뒤적이고 다. 나도 누군가처럼 출간된 지 30년이 나지 않은 책은 읽지 말아야 할까.




안 되겠다. 또렷한 내 의식으로 분연히 일어서 교보문고에 갔다. 서점에 진열된 책의 실물들이 오히려 낯설다. 침침한 눈을 홉뜨고 책들을 경건하게 바라본다. 지성심혈 짜내어 몇 권 골라 들고 서점 계단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집중인지. 이대로  끝까지 읽겠는데 싶은 책 몇 권과, 후원하는 것처럼 꼭 사주어야만 하는 작가의 신간과, 내 고장 부산과 관련된 책 한 권, 그리고 최근 다시 읽으려고 찾았지만 잃어버린 책이 있었는데 마침 재출판되어 반가운 마음에 책값을 치르고 서점을 나온다.


근처에 있는 전포동 카페거리를 걸었다. 걷는 것은 온 감각이 동원된다.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과는 사뭇 다르게, 느리지만 오감을 자극한다. 신나서 휘휘 바람 빠진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 산책할 땐 항상 생각거리를 챙겨 나오지만, 오늘은 그저 의식의 흐름과 발길 닿는 대로 걷기다.


카페거리엔 유독 젊은 아이들이 많다. 그런데 모두들 뉴진스처럼 옷을 입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옷차림이 내겐 익숙한 듯 낯설다. 아마도 세기말에 입었던 옷에 요즘 감각을 더한 Y2K 패션이 저런 건가 보다. 요즘 내가 가르치는 여고생들도 크롭티를 입고 공부하러 온다.(남자 고딩들은 언제나 영구불변 검정 추리닝) 배꼽이 보일락 말락 한 티셔츠를 입은 깨발랄한 아이들에게 요즘 고전시가를 가르치고 있다. 어제는 도산십이곡을 열강하다 웃어버렸다. 퇴계 선생이 저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하실까 망측다 하실까 궁금해서였다. '고인(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古人)을 몯 뵈'(었지만 요즘 아이들 어여쁘게 봐주세요).


이곳 서면과 전포동의 경계는 내게도 추억의 동네다. 전포동과 붙어 있는 서면엔 극장가가 있었다. 나는 그때 서면 동보극장에서 재개봉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봤고, 톰 크루즈의 '탑건'도, 페트릭 스웨이지의 '더티 댄싱'도 그곳에서 봤다. 공부 안 하고 싸돌아 다닌다고 엄마에게 잔소리 100대쯤 맞았지만, 내 일기장에 그날 본 행복의 자락들을 펼쳐놓았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기고 모두 없어졌지만, 내 추억은 내 머리에 있으니까 그렇게 서러울 일은 아니다. 그리고 세파에 쓸리기는 했지만 더러 예전의 골목들도 남아 있어 반가웠다. 익숙한 초록색의 세이렌 간판이 보인다. 바닐라 플랫화이트 한 잔 마셔야겠다.

 

흘러가는 의식을 붙잡는다. 얼른 집에 가자. 칠링한 와인 한잔과 곁들여 읽을 책 한 권 때문에 발걸음을 서두른다.


카페거리에 있는 공장을 개조한 와인숍에서 로제와 화이트 와인 한 병씩 사서 돌아간다


독자! 얼마나 설레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은 책 중의 진골을 찾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건 대단히 행복한 일이다. 없는 솜씨 부려 굳이 가 쓰지 않아도 세상엔 좋은 글들이 하늘의 별만큼 많다는 걸 다시 깨닫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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