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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ug 23. 2023

여름 산책, 통영


집에 돌아오자마자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고, 여기저기 나뒹구는 타월들과 화장대 위를 정리한다. 서둘러 떠나느라 어질러져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묘한 감정이 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음에 떠날 때는 돌아 올 나를 위해서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떠나자고.


한여름 산책은 힘들지만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는 헛소리에 꽂혀서, 갑자기 자동차로 100킬로나 달려 통영에 왔다. 대청소날 오래 내버려 둔 벽장을 정리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조금만 정리하자 싶어 꽤 멀리 산책을 나온 것이다. 8월 말이 가까워지면 더위가 한 꺼풀 벗겨질 법도 한데 여전히 한낮의 기온은 30도를 넘겼고, 습한 바닷바람은 옛날 우리 동네에 살던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따라다닌다. 그러나 동쪽 벼랑 위(동피랑) 정자에 앉으니 사방이 탁 트여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여름 통영은 세상 모든 푸른빛을 다 끌어다 모아놓은 것 같다.



동피랑 초입에서 안내판을 보고 있는데 중년 여자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벽화마을에 어린 왕자가 있다던데 여우도 있고, 거기서 사진이나 찍고 가자. 그래? 어린 왕자? 어디쯤에 있지? 에구 더워라.


......?!

대화를 듣다가 이들의 수고를 조금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저... 어린 왕자는 부산에 있어요. 감천문화마을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어린 왕자와 여우가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여자들이 까르르 웃는다. 부산에요? 부산에도 벽화마을이 있어요? 에구 난 여긴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또 까르르 웃는다. 나도 웃는다. 밝은 여인 둘의 웃음이 투명하고 청량하다. 동피랑을 돌다가 두어 번 마주쳤는데 그럴 때마다 서로 웃음을 주고받았다.


 초록지붕집 파란 대문 위의 능소화가 어떤 벽화보다 마음을 끈다


집을 떠나오니, 주인 없는 집에 그 자리 그대로 있을 하루종일 눕거나 앉아서 등짝을 붙이던 내 하늘색 소파며, 어른 여섯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거실의 큰 테이블이며, 내 서재에 정물처럼 꽂혀있을 그 많은 책들과, 내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을 내가 없으면 아무도 눕지 않을 커다란 침대를 떠올린다. 그러자 갑자기 그리워진다.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아들을 둔 어미 마음이 이렇게 왔다 갔다 했으려나.


오후엔 호텔 앞 산책길을 꽤 걸었다.


옛날 누군가가 내게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당신 눈이 나쁜 거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말았는데, 마음이 뜨끔했다. 싫은 것은 바로바로 얼굴에 드러나면서, 좋은 것은 아마도 잘 감추는구나 생각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아주길 바랐지만, 타인들 입장에서는 굳이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애써 들여다볼 필요가 뭐가 있었겠나 싶은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나를 스쳐간 많은 인연들에게 친절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걷는 내내 따라다닌다. 삶의 복판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혼자니까 더더욱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안전하게 나를 지키려고 했다.



낯선 곳을 산책하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 헤맴들은 언제나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풍경들을. 그러니 살다 보면 조금 헤맬 수도 뒤따르던 사람들에게 먼저 가라고 길섶으로 물러 설 때도 있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독인다.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 말자고도 다짐한다.


뜨거운 한낮, 달아공원에서
박경리 기념관


매미 소리도 많이 잦아들었다. 아직까지 폭염 경보가 제비처럼 날아들지만, 이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을 게다. 그동안 피해 다니던 여름 속에 앉아 있으니 오히려 술래에게 잡힌 것처럼 조바심치던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지구라는 별에서는  사소한 것도 특별한 것도 똑같은 무게를 갖는 게 아닐까? 인생은 각자 걷고 있지만 어차피 같은 곳으로 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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