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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an 18. 2024

겨울산책, 어설픈 탐조생활


겨울 산책은 다 좋은데 귀가 너무 시리다. 그래서 예쁜 이어머프를 샀다. 삿포로  갈 때 입으려고 샀던 테디베어 부클점퍼가 여행이 무산된 후 옷장 속에  얌전히 들어있는 게 아까워 입고 나섰다.(더웠다. 부산은 삿포로가 아니잖어.) 아주 추운 날 빼고는 그래도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는 산책을 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지만 겨울이 되니 동네 하천에서 다양한 겨울 철새와 화려한 계절에는 보이지 않던 텃새들을 만난다. 눈썰미 좋은 나는 다른 생김의 새들을 잘 포착한다.


며칠 전 동생과 산책 나갔을 때는 전깃줄에 앉아 있는 황조롱이를 만났다. 동생은 비둘기가 아니냐고 했지만 멀리서 봐도 남다른 포스가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 보니 황조롱이가 맞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올려다보자 녀석도 아래로 내려다본다. 서로 눈싸움을 했다. 근데 녀석이 눈을 피하더니 날아갔다. 큭큭큭 내가 이겼다고 좋아하니 동생이 모자란 사람 보듯 다. 


자그마한 몸짓에서 명랑함이 묻어나는 딱새와 멧새도 요즘 자주 보는 새다. 물닭과 흰뺨검둥오리는 언제 봐도 귀엽고, 왜가리는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때문에 볼 때마다 웃게 된다. 후투티를 만났을 땐 너무 좋아서 꺄악 소리를 질렀다. 내가 새를 좋아하는지도, 꽤 많은 새 종류를 알고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깨달았다.


동네 하천의 왜가리와 백로와 흰뺨검둥오리들
을숙도 남쪽 탐조대에서


내친김에 오늘은 차를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을숙도를 다녀왔다. 남쪽 탐조대에서 수많은 철새들을 만났다. 드폰 카메라로 다 담을 수 없는 을숙도 하구의 모습은 약속의 땅이었다. 저 속에 기러기도 청둥오리도 노랑부리저어새들도 시간 맞춰 찾아와 있다. 그중에 제일 많았던 큰고니는 우아한 자태와는 달리 울음소리는 요란스럽고 꽤 거칠었다. 


잘 있다가 한 마리도 낙오되지 않고 떠났으면 싶었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여기저기서 약속의 문자들이 온다. 철새들에게서 철마다 옮겨 다니는 것을 배울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닮아야 할 텐데 싶은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걷기 좋은 미운오리 테마길
기차를 테마로 한 분식집, 유부가 들어간 우동이 맛있다


겨울인데도 내리쬐는 햇살은 눈부시고 하얀 운동화는 상큼하게 느껴져서 발을 잠깐 멈추었다. 요즘 주로 검은색이나 네이비 컨버스만 신고 다녔는데, 기분 탓인지 나이 탓인지 어두운 색이 싫어져서 하얀색 새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가볍게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두 시간을 넘게 걸었다. 산책할 때는 쉬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강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가져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고즈넉한 겨울 풍경과 음악이 어울려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듯싶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풍경을 오래 담았다.


숱한 미몽들이 스스로 생을 조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데, 그때는 왜 그리 멋 부리듯 우울함을 두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염세와 비관, 슬픔과 고독 시간들을 미리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은 팔짱 끼고 생을 관조하며 산책하듯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사유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조금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시절은 하 수상해도 산책 만나는 새들의 겨울은 삭막하지 않아서 다행이. 나의 어설픈 탐조생활은 계속될 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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