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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수 보살 Oct 29. 2024

파도(波濤)

다른 시점과 완결.


다른 시점과 완결


지난해 유독 추웠던 겨울에 너와 내가 치밀하게 숨겨온 비밀이 우리 둘 눈앞에 떡 하니 실체를 드러냈다. 그 뒤 따뜻한 봄에 활짝 핀 벚꽃도 다 지고 어느새 초여름이 다가온 이 시점에도 우리는 여전히 연락을 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네가 연락을 피하고 있지. 연락이 안 되는 동안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해 너 몰래 두 사람 몫의 호주행 비행기 표와 호텔 숙박을 결제했어.

"아직도 답장이 없어?"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온 지나 언니가 냉장고에 사 온 음식을 정리하고 다가와 묻는다.

"응. 이번엔 꼭 호주로 가서 서핑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 들통나버렸길래 이렇게 까지 연락을 피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너무하네"

"내가 실수한 거야"

지나 언니의 비꼬는 말투가 들리자 습관적으로 윤아를 두둔했다. 사실 두둔이라는 것도 웃기다. 그날 밤 내 실수로 몇 년 동안 잘 지켜왔던 우리의 비밀이 드러나 버린 거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맞다. 내 눈치를 보던 지나 언니가 점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콩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물었지만 거절하고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지나 언니가 요즘에는 다들 건강 생각해 전자담배를 피운다고 몇 차례 권유 했지만 나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는 연초를 끊을 생각은 없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내뱉자 생각도 덩달아 깊어진다. 그 사건 이후 며칠만 지나면 다시 연락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 받은 상처가 싶었는지 몇 달이 지나도 연락도 없고 집 앞으로 찾아가도 인기척이 없다. 대학교 4년 내내 룸메이트로 지내고, 각자 취업 후 일이 바빠졌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얼굴을 보던 사이인데 메신저 답장 하나 보내지 않는 관계가 되어버리니 돌아 버리겠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 보니 여름 장마 시즌답게 방금 전까지 쨍하던 하늘이 흐려지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내리기 시작한다. 너를 처음 만난 날에도 이렇게 흐리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렸는데. 어두운 방안에 스위치를 켜자 누워있다 벌떡 몸을 치켜세워 경계하지만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는 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지. 살 부대끼며 지내보니 성격도 행동도 예민한 고양이를 닮은 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서 거리를 뒀지만 점점 그 거리가 좁혀지는 게 보일 땐 높은 장벽을 쓰러트려 성을 차지한 장군이 된 기분에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어. 순간씩 튀어나오는 애매한 감정에 잠시 혼란함을 느꼈지만 이러다 사라질 감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어.

그러다 어느새 너를 보는 감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어. 중간고사 기간 불안함에 잠 못 드는 너를 보는 게 괴로워 달래 볼 겸 침대를 넘어가 스트레스를 받아선지 조금은 푸석하던 단발머리를 굵은 빗으로 천천히 빗어주자 긴장으로 말렸던 어깨가 풀어져 나에게 기대 오던 너의 체온도. 23시 30분 점호 시간 지나 도사관에서 돌아온 네가 배가 고프다며 울상을 짓자 사감 눈을 피해 몰래 치킨을 시켜 먹었던 맛도. 평소 입이 짧던 네가 잘 먹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다 행복하더라. 그 뒤로 나는 매일 같은 브랜드에 치킨만 시켜 먹는 습관이 생겨 항상 지나언니의 불만을 듣곤 해. 우리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무렵 더 욕심이나 가족사를 꺼냈지만 듣는 너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주제인 서핑을 꺼내자 자세를 내 쪽으로 돌려 어릴 적부터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너의 말을 듣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 

기숙사 룸메이트 사이가 아닌 오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매개체를 우연히 찾았으니깐. 중간고사가 끝나자 예민함이 가신 너를 고셔서 강원도 양양을 데려갔을 땐 사실 큰 기대는 안 했어. 대충 알려주고 호텔로 돌아가 스파를 즐길 생각만 가득했거든. 그런데 몸치인 네가 연거푸 바닷물을 마셔도 포기하지 않고 보드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지만 보란 듯이 두 다리로 기상한 모습을 보이며 환호를 지르는 모습을 보자 생전 처음 눈동자 반쯤 눈물이 차오르고 입이 찢어지게 웃는 이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어. 그날 우리의 얼굴 표정들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아.

또 한 번은 3학년 겨울 방학 때 빠듯한 네 사정에 도움이 되고 싶어 아버지에게 부탁해 소개받은 일자리를 주선해 주자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독서등에서 나오는 작은 불 빛 밑에서 도슨트 시나리오 문구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던 성실한 뒷모습이 잊히지가 않아.

며칠 뒤 도슨트 첫 데뷔 날 안국역 3번 출구 역 앞에 있는 꽃집에서 산 데이지 꽃다발을 들고 갔을 땐 내가 다 떨리고 긴장했어. 사실 아침에 잔뜩 굳은 얼굴로 다녀올게 하던 네 모습을 보자 괜히 소개해 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너는 잘 해낼 거라 믿었어. 성공적인 너의 데뷔를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뜨거워진 고데기로 부드러운 머리칼에 볼륨을 넣어주고 옷장에서 꺼낸 샤넬 트위드 재킷을 걸쳐주자 고맙다고 말하며 웃자 나도 모르게 같이 미소 지었어. 

"안녕하세요. 인류의 시작, 메소포타미아 보물 전에 오신 여러분들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해설을 맡게 된 도슨트 이윤아입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베일에 감싸인 메소포타미아 보물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해설 시간에 맞게 도착하자 핸드 마이크를 손에 쥔 네가 뚜벅 걸어 나오며 차분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시작을 알리자 로비 앞에 중구난방으로 퍼진 관람객들이 일제히 조용해지고 너를 향해 걸어왔어. 낯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 그날은 관람객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하며 웃고, 지루한 설명이 아닌 보물 하나에 담긴 일화를 풀어내는 놀라운 재주에 관람객 곳곳에서 웃음과 탄식이 나왔어. 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나온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맨 앞줄에서 너를 올려다보며 이야기에 집중하더라. 

그날 너는 작은 기숙사 방 안에서 밤마다 성실히 공부하던 작은 등이 아닌 당당하고 빛이 나는 거목으로 보였어. 성공적인 첫 데뷔를 마치고 박물관을 울리던 박수 소리가 사라지고 조용해진 뒤 다가가 꽃을 건네자 고맙다는 말대신 반입금지일 텐데 어떻게 들고 들어왔냐는 너의 FM 성격에 크게 웃었어.

남은 2회 차 도슨트를 무사히 끝내고 퇴근한 너를 억지로 끌고 데려간 선술집에서 우리만의 작은 축하 파리도 했지.

"우리 처음으로 갔던 술집과 비슷하네"

"여기도 호쿠사이 그림이 있을까?"

"글쎄... 어! 저기 뒤에 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호쿠사이 그림이 벽에 붙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림이다. 부어라 마셔라 시간이 흐르며 테이블에 하이볼과 잔과 사케 병이 널브러질 때쯤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너 솔직히 말해봐. 정말 저 작품 좋아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잔뜩 취해 테이블에 고개를 쳐 박은 너를 안고 택시를 불러 기숙사로 들어갔어. 구두를 벗기고 침대에 눕히자 진이 빠진 나도 숨소리를 죽여 네 옆에 누워 적막의 순간을 보내는데 방금 전까지 몸을 가누지 못한 네가 손을 뻗어 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가져가더라. 너무 취해서 나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지만, 이다음에도 몇 번이나 네 주머니에 손을 넣는 너를 보며 확실히 인지했어. 만취하면 내 물건을 가져가 옷장이나 서랍장에 모아 둔다는 걸. 너의 은밀한 비밀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 뒤로 나는 겨울엔 코트 주머니에 여름엔 바지 주머니에 손에 쥘 수 있는 새 립밤과 실 핀 따위를 미리 넣어놨었어.

"야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보다 돈도 없고, 안 똑똑하고 미래에도 가난하게 살 팔자라면 어떻게 할 거야?"


THE AND

"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바닥이나 더 깨끗하게 닦아. 책상 밑에 먼지 그대로 있어."

"아, 두 번 이사하다간 죽겠다."

"반지하방인데 꽤 깨끗하다"

"그래봤자 반지하방, 아 언제 돈 모아 이사하냐?"

"네 생활력이면 1년 안에 이사한다에 한 표."

"그러면 좋겠다. 동기들은 다 정규직인데 나만 계약직이야"

"누가 그러던데 인생은 원래 비정규직이라고."

"너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충 치우고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 배고프다"

"응, 그러자"

"근데 우리 집 주소가 뭐야?"

"서울시 신림동..."


호텔 체크아웃을 마치고 5일 만에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여러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떴다. 그중 유리 씨에게 온 메신저에 답장을 보내려다가 며칠 간격으로 두 명의 발신자가 보낸 메신저가 보였다.

- 나 오늘부터 열흘정도 호주로 가. 갔다 와서 꼭 만나자 보고 싶어 윤아야-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00 대학교 1학년 기숙사 룸메이트로 잠깐 만났던 간호학과 최지나예요. 어제 해인이가 파도에 휩쓸려 부고했어요. 해인이 부모님이 급하게 호주로 가셨다고 들었어요. 이 메신저 본다면 연락 주세요.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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