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졸업 전. 운이 좋게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경기도 화성에 있는 회사에 조기 취업이 되었다. 취업난으로 허덕이던 친구들과 후배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갑자기 타지에 취업이 되고 나니 마땅한 거처를 구하기가 어려워 임시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사시는 외삼촌 댁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엄마는 남동생 집에 딸을 보내려니 미안했는지, 아니면 올케에게 눈치가 보였는지 큰 쌀 한 가마니를 보내셨고, 엄마가 쌀 많이 보냈으니 걱정마라며 말씀하셨다. 생활비도 보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가서 기죽지 말라는 의미였겠지. 어른들에게는 쌀이라는 가치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았고, 나를 받쳐주는 뒷배 덕에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겠구나 싶어 든든했다.
외삼촌 댁에는 외할머니, 숙모, 사촌 여동생 3명과 마당의 똥강아지가 있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서울에 왔다고 반가워하시면서도 아직 어린애가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며 안쓰러워하셨다. 숙모는 다 큰 애가 무슨 어린애냐며 퉁박을 주었다. 속마음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첫 만남부터 표현이 세고 냉랭한 분이셔서 엄마가 보낸 큰 쌀가마니 덕을 보겠구나 싶었던 든든했던 마음은 보이지도 않는 한쪽 구석에 찌그러졌고, 곧장 눈칫밥 먹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12월 1일 첫 출근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늘 비상금이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는 내 손에 2만원을 쥐어주셨다. 돈 쓸 일도 없고 그럴 계획도 없었지만,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주머니에 돈을 구겨 넣었다. 추우니 단단히 동여매라고 목도리를 둘러주셨는데 누가 봐도 시골뜨기 같은 내 모습이 못마땅했다. 괜시리 퉁명스럽게 삐죽거리고 추운 겨울 새벽 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다. 어둑어둑했고 코 끝을 에는 듯한 차가운 날씨는 내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첫 출근이라는 비장함을 안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갔다.
수원역 앞에 가면 회사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삼촌댁인 까치산 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 노선을 제대로 모르니 촌뜨기 아니랄까봐 두리번 거리며 헤매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렸고 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2~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회사 이름이 쓰여진 버스가 직원들을 태우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니 당연히 누구나 알겠거니 생각했는지 회사에서는 정확한 대기 장소를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버스를 향해 뛰기 시작했지만, 기사님은 신입사원인 나를 알아볼 리 없었다. 난 눈앞에서 맥없이 버스를 놓쳐버렸다. 망.연.자.실.
이 모든 것은 나의 고된 타향살이를 예고했다. 서울(나에게는 서울, 경기는 서울로 퉁쳐진다. 서울 사람들이 서울 외의 다른 곳은 모두 지방이라고 퉁치는 것처럼)에 적응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첫 출근부터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눈물이 났다. 길도 모르고 융통성도 없는 나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벽에 할머니가 내 손에 꼬옥 쥐어주신 2만원이 생각났다. 그 2만원은 나에게 구세주 같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겨우겨우 지각을 면할 시간에 회사에 도착했다. 첫 출근부터 지각이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아 택시 안에서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체력적으로는 이미 진이 다 빠졌지만, 신입 사원이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수가 알려주는 업무들을 습득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퇴근 버스를 탔고, 수원역 하차, 환승해서 까치산까지 지하철, 그리고 다시 마을버스. 서울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구나 싶으니 이 생활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내가 너무 처량했다.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게다 서울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 무표정하고 틈을 내어주지 않는지 모두 성난 사람들 같아 보였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몸은 파김치가 되어 겨우 씻기만 하고 방에 들어와 누웠는데 서럽기 그지 없었다. 모든 게 낯설었고 냉랭했다. 이곳에 버려진 기분이 들어 훌쩍거리며 숨죽여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집안이 시끌시끌했다. 어젯밤 방에 벗어놓은 스타킹이 화근이었다. 여자애가 방을 더럽게 쓴다, 칠칠치 못하다, 제 앞가림도 못한다며 숙모는 역정을 내셨다. 회사 다녀와 피곤했고,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간신히 집에 와서 잠을 잔 것뿐인데. 스타킹 빨아 널지 않았다며 된통 혼이 났다. 숙모는 외삼촌, 사촌 동생들, 심지어 강아지에게까지 수발을 다 들어주고 상냥했으나, 너무 하리 만큼 외할머니와 나에게는 냉랭했다. ‘시’자 들어간 가족이어서 그랬을까? 한술 더 떠 한참 사춘기였던 첫째는 제 엄마보다 나에게 더 눈치를 줬다. 자기 방에 있던 물건에 누가 손댔냐, 누가 가져갔냐 등으로 흘깃거렸다. 집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나마 초등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영악하고 똘똘한 것이 제법 머리가 좋았다. 이 녀석이 좋아하던 것은 고스톱! 퇴근하고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언니, 이리 앉아’ 하며 화투패를 내밀었고 몇 시간이고 질릴 때까지 게임을 시켰다. 그때까지 화투를 잡아본 적 없던 나는 초등학생 사촌 동생 덕분에 고스톱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딸과 놀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고스톱을 치는 순간만큼은 숙모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나도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고스톱은 나에게 작은 숨 쉴 구멍이 되어주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해 가끔 서러움이 몰려올 때는 마당의 똥강아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직장에서도 서러움은 계속되었다. 같은 여직원끼리의 텃새와 여직원으로서 당하는 차별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상고 출신 여직원은 경력 5년차로 나보다 급여도 높고 호봉도 높았다. 그녀는 내가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내 자존심을 밟을 말들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서 분을 삭히며 들었던 생각은, 상고 출신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고 월급도 적은데 내가 돈 들여가며 왜 대학을 다녔나 나도 상고를 가서 일찍 사회에 나왔어야 했다는 억울하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그걸 노렸을까?
또한 같이 입사한 남자 직원들은 해외 연수 및 출장, 프로젝트 담당 등 번듯한 업무들이 주어졌는데, 나에게는 출장비 정산, 복사, 정리, 청소 등의 잡무만 던져주었다. 신입사원 초봉도 남직원들이 월등히 높았다. 그들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공감을 못하는 건지 맥없이 복사지가 떨어졌다, 탕비실 커피가 떨어졌다는 타령만 해댔다.
그 사이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악착같이 회사와 서울 생활에 적응해 나갈 무렵, 용기를 내서 나가 살겠다고 외삼촌께 말씀을 드렸다. 더 있지 그러냐며 아쉬워하는 숙모의 입가에는 나에게만 보이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보니 독기와 오기로 무장된 내가 있었다.
상경 후 춥디추운 3개월을 보내고 봄을 맞아 방을 얻어 나왔다. 외삼촌 댁보다 더 낯설지만 덜 추운 곳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