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절에 이빨을 닦고,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하고, 물로 헹궈내는 시간은 길어야 7-8분 길어도 10분 정도를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군대의 훈련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물기까지 닦아내는 시간이 5분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해냈는지....(물론 군대의 종류에 따라서, 선배에 따라서 시간은 좀 더 빨라지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샤워를 했다. 꽤 오랜 시간을 물속에 있었고, 흘러내리는 물을 맞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샤워시간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일까..
과음을 하고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아침시간에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기 위한 방법은 샤워였다. 따뜻한 물을 머리끝에서부터 맞기 시작하면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갖은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찰진 등짝 스메싱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물을 낭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저녁에 늦게까지 야근이라도 하고 나면 또 따뜻한 물만큼 몸의 피로를 단시간에 잊히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건강보조제도 먹고, 홍삼 같은 영양제를 달고 살지만 한창 일할 때인 30대에는 어쩌다가 명절 때나 먹어보는 홍삼이고, 박카스가 최고의 영양제였으니, 하루의 피로 정도는 이 따뜻한 물로 흘려보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살았던 구파발의 작은 임대아파트에는 손으로 잡지 않아도 되는 마치 비처럼 내리는 샤워기가 있었다. 어느 호텔에서나 있을법한 기억 속에서나 있었던 샤워기였다. 자연스럽게 비처럼 내리는 따뜻한 물을 맞고 있노라면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느리게 흐르던 피가 움직이는 것 같았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길어지는 샤워시간에 아내의 불편함도 커져가고 등짝스메싱도 점점 찰져갔지만 아내는 기억해주고 있었다. 내가 따뜻한 샤워를 너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여행을 계획하노라면 늘 샤워기를 체크해 주고, 욕조가 있는지부터 찾아주는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받노라면 이 여자와 결혼한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갖게 되면서 욕실 두 개가 되었고, 욕조도 생겼고, 비처럼 쏟아지는 샤워기도 생겼다. 그리고 아내는 욕조를 마음껏 이용하라고 입욕제도 여러 가지 사주었다. 나의 생업이 사무직에서 생산직으로 바뀌게 되면서 많이 힘들어했다. 추운 겨울이면 아내는 나를 위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두었고, 근육통에, 피로에 좋은 입욕제를 구해주었다. 이런 아내의 도움 덕분인지 조금씩 조금씩 각종 근육통과 무거워지는 몸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일요일 오후, 글을 쓰기 전에 샤워를 한다.(습관처럼) 술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그제야 역시 피가 움직이는 느낌이다. 샤워기를 최대온도로 올려놓고(그래도 따뜻한 정도의 물) 비처럼 물을 맞고 있으면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습기가 나의 콧구멍을 통해서 머리, 폐까지 촉촉하게 적셔주는 느낌이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물로, 습기로 몸의 온도를 잔뜩 올려놓고 나면 가래가 끓기 시작하고, 곧 기침으로 지저분한 그것을 뱉어낸다. 겉의 몸도, 안쪽의 몸도 깨끗함을 느끼며 샤워를 하고, 22층의 창가의 책상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어떻게 써야 할까 하며 일주일 동안 생각했던 글재료들을 고민해 본다. 준비했던 대로는 글이 써지지는 않지만 평온한 기분으로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겨본다.
하루의 첫 시작뿐만 아니라, 여러 생활의 첫 시작으로 샤워를 한다. 문득 흐려졌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고, 내 안의 정체되어 있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고, 조금 더 그 시작들을 잘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샤워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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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이는 물처럼 맑고 고요하며, 님의 미소는 여울처럼 흐릿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네 - 율곡 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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