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인가, 두 번이었던가. 도망 다니던 일요일 새벽이 있었다. 물론 잠에 취한 채 억지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끌려가게 되었지만...
왜 항상 새벽일까? 어슴프레 밝아오는 새벽녘에 도착한 곳에서는 어서 오라는 듯이 기다란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와 같이 억지로 끌려온 듯한 동네에서 꽤 낯익은 모습의 또래 아이도 나처럼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작은 열쇠를 받아 든 아버지를 따라 신발을 들고 들어간 그곳에는 이른 시간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볼 일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물의 온도로 잔뜩 습기를 머금은 공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답답한 온도, 어린 나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뜨거운 커다란 탕 안에서는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이 연신 뜨거운 물을 틀어내는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처음에는 아빠의 품에 안겨 들어간듯한데... 점점 아빠의 강압에 이끌려 억지로 들어가 뜨거운 고통을 참아내고 또 참아내며 앉아 버티고 있다.
이때부터인가 인생이 버티기 모드로 변환된 것이... 이 괴로움이 끝나고 나면 더 큰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때를 미는 과정이다. 온몸이 시뻘게지도록 벗겨내고 벗겨내는데도 이 녀석들은 왜 이리 꾸역꾸역 내 몸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뜨거움과 온몸의 피부를 벗겨내는 듯한 고통을 찾아내면 얼마 안 되는 나만의 자유시간이 찾아온다. 잔뜩 달궈진 몸을 찬물에 집어던져보기도 하고, 어른들을 따라 더 습하고 더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가 보지만 이내 후회하며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다. 그래도 나에게는 냉탕이 가장 만만한 곳이었기에 수영장이라 생각하고 다이빙도 하고, 잠수도 해보고, 이름 모를 수영법으로 수영도 해본다. 이렇게 놀고 나면 어느새 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게 된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온다.
바나나 우유.
쉽게 마실 수 없었던 이 바나나 우유를 아버지는 보상 삼아 하나씩 사주셨다. 잠을 줄여가며, 온갖 고통을 견뎌내며 내 두 손에 쥐어진 이 바나나 우유를 조금씩 조금씩 빨대로 빨아먹을 때면 매일 이 목욕탕을 와도 좋다는 생각뿐이다.
어린 나이에서 학생이 되어가고, 좀 더 큰 학생이 되어가고, 어른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질수록 목욕탕 가는 횟수도 점점 줄어든 것 같다. 매일 하는 샤워가 더 편하고, 더 효율적이라 생각이 들면서 목욕탕이라는 단어는 점점 사라져 갔다.
30대를 지나고, 조금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40대가 되어서 다시 목욕탕을 찾게 되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가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목욕탕이 필요해서 찾아가는 그런 상황으로 변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잦은 흡연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면 어김없이 목욕탕이라는 곳이 생각났다. 예전보다는 많이 깔끔하고, 시설도 좋아지고, 각종 이벤트탕으로 가득한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이제 때를 밀러 가는 곳이 아니라, 뭐랄까 좀 쉬러 가는 그런 느낌이다. 본질을 왜곡한 채 한껏, 물놀이(와이프의 표현)를 하고 쉬다가 나오면 개운한 기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때도 있다.
이제는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바나나 우유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꼬맹이의 모습을 보니 옛날 나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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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흘러내리는 물은 맑고 시원하다.
산 중에서 목욕을 하니 몸과 마음이 더 산뜻하다. - 유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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