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기분 좋게 간지럽게 해 준다. 살짝 올라오는 수증기는 이내 외부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오늘따라 유난히 높아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머릿속을 뛰놀던 많은 생각들이 정리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아무 생각 없이 노천탕의 모서리에 양쪽 팔을 걸고 큰대(大)자로 몸을 담그고, 은은한 온도로 내 몸을 안아주는 온천 속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진정되어 가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안쪽에서 열심히 각자의 방식 데로 온천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수영장인 듯 헤엄을 치는 어린아이들, 열심히 때를 밀고 있는 어른들 이렇게 딱 두부류였지만 이들에게도 온천은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고 있다. 한 아이가 뛰어들면서 가만히 앉아 노천탕을 즐기는 나의 유유자적을 방해하였다. 얼굴에 튄 물기를 그대로 둔 채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그동안 즐겨봤던 온천들을 생각해 본다.
처음으로 온천을 만난 것은 입대했을 때인 것 같다. 공군이라 조금은 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경북 예천으로 자대를 배치받아 열심히 막내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드디어 나에게도 첫 외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막내생활을 하면서 소홀히 했던 위생 때문인지 내게는 이름 모를 피부병이 생겼고, 아버지께서 여러 가지 피부병 약과 함께 포천에 있는 유황온천으로 데려갔다. 며칠 후 잘 낫지 않던 그 피부병은 마치 바짝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처럼 내 몸에서 뚝 떨어져 나갔다. 그동안 열심히 발랐던 약 때문인지 유황온천의 효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첫 온천의 효능으로 기억되고 있다.
와이프를 만나서 일본 여행을 하며 만났던 온천들, 내가 온천을 좋아하게 되면서 찾아보고 방문했던 온천들을 생각해 본다.(온천 여행에 대한 글은 나중에 따로 써보기로 하겠다.)
내가 이렇게 온천을 즐기게 될 줄은 몰랐다. 서울 중랑구에 살던 내가 은평구로 오게 될 줄도 몰랐고, 근처에 온천이 있을 줄은 더욱 몰랐다. (중랑구와 은평구는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이다.) 이런저런 일로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싶으면 목욕탕보다는 온천을 찾아가게 되었다. 시설은 일반목욕탕보다 떨어지지만 미끌미끌한 물들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그 속에 모든 것을 맡기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멈춰있던 것은 흐르는 것 같고, 격하게 흐르고 있던 것은 멈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구 어긋난 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서 안정되어 가는 그런 편안함으로 가득해진다.
이제 나는 글을 쓰기 전에 꼭 물을 만난다. 온천을 가기도 하고, 샤워를 하기도 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한다. 그래야 잘 써진다.
가까운 온천 때문에 시설 좋은 목욕탕이 점점 멀어져 가기도 하지만, 내가 뭐 이제 시설을 이용해서 뭔가를 즐길 만큼 활동적이지 않은 것을 어찌할까?(어린아이들이 라면 물론 틀리겠지만)
온천을 이용하는 다른 분들처럼 열심히 때를 밀지는 않는다. 적당히 밀었다고 생각하면 온천과 냉탕과, 이벤트탕과 사우나를 들락날락 이용하며 논다. 그래 나는 온천에서 논다. 이것이 내가 온천을 이용하는 방법이고, 어떻게 하면 쓸거리를 찾아낼까 궁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온천에 내려앉아 펄럭이는 잠자리를 밖으로 살짝 밀어내 살려주며 하나의 생명을 살린 듯이 뿌듯해한다. 오늘 나는 높은 산과 높은 하늘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따뜻한 온천물로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지금부터 몇 년 동안 힘들어질 것들에 대해서 미리... 그리고 그 힘든 고난 때문에 만나게 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다른 곳 다른 온천에서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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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려도, 언젠가 한번 간 곳, 어찌 잊을 수 있으리.
- 이모토 아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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